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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Jul 18. 2024

나는 원조"고딩엄빠"다(11)

#11.

   마음을 다잡아먹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켜야 할 내 아이를 봤다.


 아이는 똑똑했다. 세 살인데도 웬만한 글자를 다 읽었다. 뭐든 한 번 보거나 들으면 잊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서툴렀지만 한글도 곧잘 썼고, 쉬운 더하기 빼기를 했다. 궁금한 것이 많아서 질문도 많았다.


 아마 그때 내가 조금 나이가 있는 엄마였더라면, 아이의 영재성을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아이가 조금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아이만 보고 살기로 굳게 결심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웃의 아줌마들과 함께 부업의 전선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방세를 낼 수가 없었고, 생활비를 댈 수가 없었다. 여전히 엄마가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생활비의 규모가 자꾸만 커지고 있었다. 방세도 올라갔다. 아이에게도 욕심이 생겼다. 속셈학원이라도 보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 했고 더 아껴 써야 했다.


  사실 더 아낄 것도 없었다. 이천 원짜리 삼선 슬리퍼를 꿰매가며 몇 년씩 신었고, 낡아진 속옷을 꿰매 입으며 엄마가 팔다가 남아서 준 청바지 하나로 사계절을 살았다. 먹는 것도 늦가을에 시골에서 해온 김장김치 하나로 끓이고 볶아 먹으며 6개월을 버텼다. 다른 부식은 엄마가 간간이 가져다주는 채소나, 마른반찬으로 살았다.

 그 당시엔 외식문화가 그리 흔하지 않기도 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외식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계라는 게 있었다.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은 동네 아줌마들과 더 친하다 보니 그들과 매달 조금씩 계를 부었다.

 “돈이 힘이야. 나만 아는 돈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일명 비자금을 말하는 것이다.

 아줌마들이 내게 일러준 지침이었다.

나는 아끼고 쥐어짠 돈을 조금씩 모아나갔다.

금계도 하고 돈계도 하고.


  한 달쯤 지나서 남편이 돌아왔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왔다.

아침에 일 보러 나갔던 사람처럼 돌아왔다.

 단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훗날에도 사과한 적이 없다.


  시어머니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뇌출혈로 쓰러져서 치매를 앓은 지 십이 년이 지나고였다.      

 시어머니가 아직 젊었을 때 시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재직했다고 한다.

  그때 시어머니는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시아버지와는 떨어져서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시아버지가 외도를 했던 모양이다. 그것을 시어머니가 알게 됐고 따지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부부싸움 중에 시아버지가 시어머니의 따귀를 때렸는데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손상된 고막은 회복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평생 한쪽 귀의 청력을 잃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그 얘기를 하면서 시아버지를 원망했다.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시면서도 수십 년 전의 일을 너무도 꼿꼿하게 기억해 냈다. 시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외도로 인해 겪었을 시어머니의 고통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묻어둔 상처는 틈만 나면 들고일어났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때 네가 어땠는데!’ 라며, 과거의 망령을 불러냈고 소리쳤다. 아이가 있건 없건 흥분했고, 그거에 맞서서 남편은 폭언과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폭언과 욕설을 들으며 자랐다.      


 남편의 부모님이나 우리 부모님은, 그 어떤 것보다 당신들의 삶이 우선이었다. 부모로서 당연히 갖아야 하는 책임감 같은 것은 없었다. 자식의 미래나 교육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을 쓴 기억이 없다.

이기적일 정도로 자신들의 삶이 먼저였다.


 남편의 부모님은 자식의 교육은 학비만 대주면 되는 건 줄 아셨다. 그 외에 들어가는 부대비용은 염두에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남편이 옷 하나를 사 입으려 해도 책값이 필요하다거나 학교에 돈을 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고 한다. 알아서 신발이나 옷을 챙겨 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우면 이해가 가겠는데 시집은 그 동네에서 잘 산다고 소문난 집이었다.


 “저 위에 사는 누구는 학원 한 번 안 가고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갔다더라.” 거나, “누구네 둘째 아들은 서울 가서 낮에 공장 다니며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더라.” “ 윗집 누구는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 가더니 이번 명절에 소를 끌고 내려왔다더라.” 같은 이야기를 명절마다 들었다.      


  아기의 우유값을 걱정하고 있는 우리에게 들려서 가스레인지를 사러 나왔노라고 자랑할 정도였다. 우리는 당장 저녁거리를 걱정해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그 동네에서 제일 먼저 가스레인지를 장만하는 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고 싶은 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로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우리 아버지와 엄마도 별다를 바 없었다. 자식들의 교육이나 장래 걱정보다 당장의 당신들의 감정에 충실했다. 아버지의 외도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고, 아버지와 헤어진 엄마도 여러 남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 속에서 나와 동생은 스스로 자라나야 했다. 그렇다 보니, 남편도 나도 가정교육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사람으로서 배워야 하는 기초적인 가정교육조차 있지 않았다고 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든가, ‘베풀어라’라든가, ‘마음을 바로 써야 한다’ 같은 사람으로서 알아야 하는 기초적인 인성에 대해서 배운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부모로서의 도리라든가, 어른으로서 갖춰야 하는 품격 같은 것은 본 바도 없고 들은 바가 없다 보니 우리는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살았다.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살아도 삶은 이어졌다.


  아이가 네 살,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시골집에서 온갖 폭언 속에서 추위에 떨며 김장을 마치고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저녁 9시가 다되었는데 주인집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전화가 왔다고.

주인집 거실로 들어서며, “누구예요?”라고 물었다.

 “모르겠어. 뭐 애 할머니가 다쳤다는 거 같아.”

 전화를 받아보니 큰 아주버니였다.

 “엄마가 많이 다쳤으니 빨리 응급실로 오라고 해요.”     


 병원으로 달려간 남편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시어머니가 시골집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가다가 미끄러지며 넘어져서, 응급차에 실려 종합병원응급실로 왔다고 했다. 검사결과, 정강이뼈가 골절이 돼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

 “무슨 일이래?”

 간밤의 일이 몹시 궁금하셨는지.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 방을 찾아왔다. 나는 들은 대로 말했다.

 “그러게, 사람일이라는 게 알 수가 없다니까. 그래서 마음을 잘 쓰고 살아야 하는 거야. 우리 할머니가, 애 할머니 다쳤다니까 죄받았다고 하시더라.”          


 시어머니는 당장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혈압이 높아서 혈압을 낮춰야 하고 잔뜩 부어오른 다리의 부기가 빠져야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술이 결정될 동안 특실에 입원하기로 했다. 나는 다음날부터 병원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 시어머니의 밥은 병원에서 나오는데 시아버지의 식사 때문이었다. 세 때를 모두 다 사 드시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큰동서가 말했다. (그때 둘째 세 째 아주버니는 결혼하지 않았다.) 나와 큰동서가 번갈아 식사를 나르자고 했다.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쌀도 쌀이었지만, 반찬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또 반찬을 사는 돈은 어떻게 충당을 해야 할지.


 다음날부터 아침은 큰 아주버니가 출근하면서 가져다 드렸고 나는, 점심을 가져다 드리기로 했다. 저녁은 큰동서가 가지고 오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도 못 뜬 아이를 깨워 씻겼다. 그리고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석유곤로에다 반찬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싸게 먹히는 콩나물을 삶아서 무치고 어묵을 볶았다. 그 두 가지를 푸짐하게 하는 데 천 원이면 됐다.


 지금은 천 원이라고 하니까 우스워보여도 우리 방세가 삼만 오천 원이었다. 그 당시 그리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도 매일 그렇게 들어간다고 하면 우리 방세만큼의 돈이 식비로 없어지는 것이었다.


 끓이고 볶을 곳이 석유곤로 하나이다 보니까 반찬 두어 가지 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더군다나 내가 일에 요령이 없어서 더 더뎠다.      

그리고 시골에서 해온 김장김치를 담았다. 그때 내 형편에 해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성찬이었다.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는 걸어서 2킬로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네 살짜리 아이를 걸리고 도시락 가방과 아이의 장난감과 먹을 것이 든 가방을 양손에 들고 걸어서 병원으로 갔다.


 길이 미끄러웠다. 며칠 전 온 눈이 추위에 녹지 않고 빙판이 되어 있었다.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버스가 다니는 노선이 아니었고 택시를 탈 형편도 아니었다.

 아이가 힘이 드는지 자꾸만 나를 올려다보았다. 업고 가자고 조르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내 양손에 들린 짐을 보고는 이내 체념했다.


 병원에 도착하니까 시어머니는 노발대발했다. 너무 늦게 왔다는 것이었다. 당신들은 12시에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뭘 꾸물거리다 이제 온 거냐며 화부터 냈다.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엄동설한을 뚫고 걸려서 온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아이가 자꾸만 내 뒤로 숨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환자 침대에 걸쳐진 식탁을 펴고 점심을 풀어놓았다. 시아버지와 어머니는 병원 밥이 적었다며 함께 점심을 들었다.      


 두 분이 점심을 먹자마자 나는 다시 돌아서 나와야 했다. 저녁을 해오기로 했던 큰동서에게 일이 생겨서 저녁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저녁까지 내 몫이 된 것이다.      

 다시 가서 저녁을 해서 또다시 병원엘 와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었다. 아이도 지쳤는지 저녁에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나는 꾀를 냈다. 점심때 아예 저녁밥까지 해가기로. 다음날부터는 밥을 해서 전기밥솥째 들고 갔다. 반찬도 더 넉넉하게 하고 시골에서 가져온 고추장을 통에 담에 병원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도시락에 담긴 밥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특실이라서 병실 하나를 어머니 혼자 사용했다. 그러니까 일이 없는 두 아들과 두 아들이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까지 저녁에 몰려들었다. 거기다 남편까지. 그 많은 인원이 다 함께 저녁을 병원에서 해결하는 것이었다. 도시락으로는 그 많은 인원의 식사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병원행을 하던 어느 날, 아침부터 아이가 열이 났다. 전날저녁부터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를 이끌고 병원엘 갔더니 오후부터는 열이 더 오르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엔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보던 둘째 아주버니가 깜짝 놀랐다.

 “안 되겠다. 이러다 애 큰일 나겠어요. 빨리 집으로 갑시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델몬트 오렌지 주스 두 병을 꺼내서 아이의 가방에 담아주었다.      


 한 달여를 입원하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다녀갔다. 사람들은 방문할 때마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음료수박스를 들고 왔다.

 병실 구석에 산처럼 쌓인 박스들을 시아버지가 시골집으로 이삼일마다 차에 실어 날랐다.

 오후, 여덟 시간여를 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아이에게 음료수 한두 병 쥐어 주기는 했어도, 집에 가서 애 먹이라고  주스 한 박스 들려준 적이 없었다.       


 둘째 아주버니는 곧바로 아이를 업고, 택시에 태워서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면서 내일부터는 오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다음날 수술날짜가 나오니까 며칠 안으로 수술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이를 서둘러 방에 눕히고 감기약을 먹여 재웠다. 김치통밖에 없던 우리 냉장고에 그날 처음으로 델몬트 오렌지주스가 두병이 들어 있었다.      


   부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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