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수술한 시어머니는 다음날 바로 퇴원했다. 다리에 깁스를 했기 때문에 병원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 한 달여는 통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큰 아주버니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곳엔 둘째 아주버니가 함께 살고 있었다.
큰 아주버니네 집에 묵고 있던 시어머니는 아침 식사를 마치면 둘째 아주버니의 부축을 받아 우리 집으로 출근하듯 왔다. 하루 종일 두 어른이 우리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에는 둘째 아주버니의 여자친구, 셋째 아주버니와 그의 여자 친구가 집으로 왔다.
비좁은 단칸방에 시어머니를 비롯해 둘째 아주버니와 여자친구, 셋째 아주버니와 여자친구, 나와 남편, 아이까지.
꽉 들어앉아 그 겨울을 지냈다.
우리는 화투도 하고 윷놀이도 하고 식사준비에 쓸 파도 다듬고, 마늘도 다듬었다.
그 덕에 성질 고약하고 변덕 심했던 시집 식구들과는 거리가 조금 좁혀진 듯했다.
우리의 식량을 축낸 것에 미안해하며 쌀도 한 가마 더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부식비라며 돈도 얼마씩 내놓기도 했다.
쌀쌀맞고 폭언을 밥 먹 듯하던 시어머니도 약간은 누그러진 말투로 나를 대해줬다.
여자 친구들이 찾아올 때마다 아이의 과자를 사들고 왔고, 둘째 아주버니는 치킨을 사 오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관계가 좁아지며 나도 어느 정도 막내며느리로서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3월 중순쯤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12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나는 그들의 밥을 해먹인 것이다. 나는 인정받는 것이 너무 좋아서, 시어머니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좋아서, 잘한다는 말이 좋아서, 반찬이 맛있다는 말이 너무 좋아서, 그들의 밥을 해 먹이는 것에 힘든 줄도, 추운 줄도 모르고 그 겨울을 보냈다.
아이는 다섯 살이 되자 책을 읽었고 웬만한 셈을 했다. 구구단도 외웠고, 영어도 가르쳐주면 가르쳐 주는 대로 읽고 썼다.
그러자 남편에게 욕심이 생긴 거 같았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정상적인 절차 없이 낳은 아이였지만,
나중에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 아닌 주목을 받으며 살았다. 저러다 말 것이라는 말도 무수히 들었다. 시골의 시부모님의 이웃에서는 내가 언젠가는 포기하고 떠날 것이라는 얘기를 모여 앉으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와 내 동생은 우리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랐다. 가정에는 안중에도 없이 밖으로만 나돌던 아버지. 아버지와 헤어지고는 끝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던 엄마.
우리는 그 속에서 자랐다.
나와 동생은 무언중에 절대로 엄마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알았다. 부모의 관심을 벗어난 자식들이 절대로 잘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을.
엄마가 아버지와 헤어진 것은, 아버지가 스물일곱 살짜리 여자와 교회에서 한 달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엄마는 과수원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교통도, 통신도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니 소식은 오로지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소식은 늘 늦었다.
사람들은 딸 같은 여자를 데리고 도둑장가를 갔다고 했다.
젊은 여자와 아버지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엄마는 집에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고 있었다. 바람난 남편을 되돌린다는 굿이었다. 우리 집 곳곳에는 부적이 숨겨져 있었고, 부뚜막의 벽에는 아버지의 양말을 걸려 있었다. 그 속에도 부적이 들어있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떡이 담긴 시루 위에서 무당이 작두를 타고 요령을 흔들며 현란하게 춤을 추던 그 광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엄마는 그 앞에서 손바닥이 닳을 정도로 비비며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으리라.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 늦가을이었다.
분에 못 이긴 엄마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눈치였다. 자주 집을 비웠고 낯선 남자들이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번듯한 남자를 만나 복수하듯이 한 번 살아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 속에서 느꼈던 소외감이 얼마나 내 어린 시절을 외롭게 했던가?
심지어 나는 첫 생리를 할 때도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못했다. 내가 6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남자였다. 주변에 마음 놓고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너무 무섭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의 관심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엄마는 내게 매질을 했다.
“이 엄청난 년, 어떻게 그런 걸 말하지 않았어?”
말할 시간도 기회도 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늘 집에 없었다. 밤에 낯선 남자들이 와서 자고 가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미 반항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집 밖엘 나가지 않았다. 엄마가 아침 일찍 가게로 나가면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가도 조퇴를 하고 집으로 와버렸다.
나는 자주 아팠다. 머리도 아팠고 배도 아팠고 어지러웠다. 조퇴하는 이유였다.
친구들이 니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이 싫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네 부모님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것도 싫었다.
나는 점점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고 말 수가 적어졌다.
내 동생은 재능이 많았다. 그림을 잘 그렸고 피아노도 잘 쳤으며 예쁘게 꾸미는 손재주가 있었다. 버릴 물건도 그 애 손에만 가면 뭐든지 쓸 만한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동생의 재능 중 무엇 하나 살리지 못했다. 엄마는 동생에게 그런 재능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렇기에 그림도, 피아노도 취미 정도에서 멈춰버렸다.
만약 동생의 재능을 엄마가 발견하고 조금만 제대로 뒷바라지를 해줬더라면, 동생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직도 생활에 찌든 채 남편의 눈치를 보고 사는 동생을 보며 나는 생각하곤 한다.
아이에 대한 남편의 교육은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이었다.
매일 일정분량의 한글을 노트에 써야 했고, 산수를 풀어야 했고, 영어도 해야 했다. 남편이 아이에게 매일 숙제로 내줬고 남편이 귀가하기 전에 마쳐놔야 했다.
벗어놓은 옷은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잘 개어 놓아야 했고, 벗어놓은 신발은 앞쪽을 향해 가지런히 놓아야 했다. 어른을 보면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해야 했다.
그것을 어겼을 때는 남편은 아이에게 체벌을 가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어릴 적에 부모에게서 교육받은 그대로라는 것을 나는 훗날 알게 되었다.
남편이 어렸을 적에 시부모와 함께 도시로 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남편에게 먼저 버스에 뛰어올라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고 한다. 남편이 자리를 잡지 못하면 시부모님은 남편에게 약지 못하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 싫었다고 남편은 말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귀가하면 무서웠다고 했다. 술김에 잠든 아이들을 깨워 숙제검사를 했고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으며 매도 맞았다는 것이다.
옷에 흙이 묻으면 엄마에게 혼이 났기에 운동장에서 함부로 놀아보지 못했고, 집안의 집기들은 망가진다고 절대 만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뭐든지 안 되는 것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에게 그렇게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
유치원에 가서도 운동장에서 행사할 때 쪼그려 앉아있는 아이는 우리 아이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리 아프니까 편히 앉으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옷이 더러워진다고 대답했단다. 소풍을 가서도 자신이 먹은 간식의 껍질을 온종일 들고 다니는 아이도 우리 아이밖에 없었다. 쓰레기는 집에 버리는 것이라고 끝까지 되가져왔다.
어찌 보면 어릴 때는 누구나 그랬다.
신호등을 어기는 것은 어른들이고 아이들은 절대로 빨간불에서 길을 건너지 않는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도 어른들이다. 아이들은 유치원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행동한다. 어기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자란다.
어겨도 되고 버려도 되고 남의 것을 탐내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어른들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적 교육과 자율적인 교육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쩌면 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