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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Apr 10. 2020

존댓말을 쓰자 !

  나는 존댓말이 좋다. 한국의 위계문화에서 존댓말이 가지는 폐해가 자주 지적되지만 난 여전히 존댓말이 좋다. 물론 '상호존댓말'만이 해당한다. 몇 번의 말이 오가다보면 정해진 절차처럼 말 놓자는 순간이 따라온다. 나에겐 그 순간이 보통 이르고 대개 불편하다. (보자마자 대뜸 말 놓는 상대는 아예 논외다. 거론할 가치가 없다 판단한다.)


 존댓말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싶어서다. 편해지거나 친해지거나, 둘 중 하나를 위해 말을 놓는다고 짐작한다. 일단 난 대부분의 사람과 편해지고 싶지 않다. 편한 관계는 서로에게 무례해질 수 있는 위험을 수반한다. 친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거리를 유지하며 지인으로 지내도 소통에 큰 무리가 없다.


 게다가 나 또한 누군가의 편하거나 친한 사람이 되기 어렵듯 모든 상대가 나와 가까워지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밀어내기도 전에 상대가 떠나가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다. 그런데도 왜 반말을 통해 친해지길 서둘러야하는지 모르겠다. 인위적인 시도로 가까워지는 모험을 감수하기엔 경험이 말해준다, 그 모험은 확률적으로 기회비용이 더 큰 소모적인 일이라고.


 따라서 나의 존댓말 선호 경향은 개인적 경험이 유발한 방어기제의 표현형이라 볼 수 있겠다. 이는 감정과도 연관 돼있다. 위에서 말한 멀어지는 경험은 익숙해져도 무뎌지지 않는 아픔을 준다. 말을 놓았던 사이가 다시 존대할 때 느껴지는 오묘한 감정이 있다. 어떤 감정인지 명료하게 묘사할 순 없으나 아마 상실감에 가까울 것 같다. 그동안 쌓은 친분이 흩어지고 그 기억 속의 나는 부서진다. 그 순간 일종의 허무함도 가세한다. 


 상실에 대비할뿐만 아니라 자유를 지키고자 존댓말을 쓰기도 한다. 막상 말을 놔도 시간이 흘러 존대하는 그들은 나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셈이다. 나는 그들이 반말을 하거나 존대를 하거나 등의 자유를 맘껏 발휘하는 동안 그저 대상으로서 수동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난 그들의 자유(positive liberty)로부터 영향받지 않을 자유(negative liberty)의 일환으로 말을 놓는 추가적인 행동을 취하고 싶지 않다.


 대인관계는 힘들다. 사람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없다. 난이도 최상의 문제를 풀며 에너지가 많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문제엔 배점이 높다. 풀어냈을 때 얻게될 게 많다는 것이다. 풀기 어렵겠지만 그 보상을 기대하며 가까워지길 계속해서 시도한다. 물론 전보다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이들에게 다가간다. 만에 하나 모험이 성공적으로 끝나 친해지더라도 편해지는 건 다른 문제다. 친한 관계가 꼭 반말로 대화나누는 편한 관계와 동일하게 다뤄져야하는지 의문이다. 말을 놓자는 제안을 친해지기도 전에 툭하고 던지는 것은 이런 노력과 고민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4년 전 누군가 내게 말했다. 친구 관계에도 밀당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맥주를 홀짝이던 그 사람이 말한 '밀당'이 가리키는 바를 정확힌 모르겠다만 노력이 필요하단 맥락이었던 건 분명하고 또 동의한다. 반말도 그 노력의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적어도 나에게) 반말은 방어기제만 작동시킬 뿐이다. 관계에서 거리가 가지는 유동성은 당연하다만 가까워지는 것이 주는 희열보다 멀어지는 때의 상실감이 훨씬 크다. 나를 일순간 뒤흔들었던 그 사람도 지금은 꽤나 멀어져 보이지 않는다. 마주쳐도 인사하려나. 


 고로, 나는 존댓말이 좋다.



추신,

 '밀당'에 대해 주관적 이해를 덧붙이자면 밀당하는 관계는 친하더라도 편한 관계는 아닐 테다. 그 사람이 표현한 '밀당'엔 반말이 함의하는 편한 관계의 필요성에 의문을 던진 걸까. 아무튼 존댓말이 너무 불편해서 말 놓자는 제안이 나는 불편할 때가 많다. 누군가 불편함을 짊어져야한다면 기본값인 존댓말을 그대로 두자는 보수적인 태도마저 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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