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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Apr 10. 2020

걷는 게 낯설어질 때

사는 게 낯설어질 때

 (2017년에 쓴 글을 꺼내본다. 고민없이 기계처럼 글을 써내려가는 지금의 내게선 나올 수 없는 글이다.)


 오른쪽 발을 뗀다. 그리고 공중에서 허우적대기도 잠시 발바닥이 바닥에 닿자마자 다른 쪽 발은 바닥을 차고 날아오르려한다. 금방 떨어지겠지만. 아니 근데 잠깐만. 공중에 떠 있는 동안 어느정도의 각도로 다리를 접은 채 발을 대롱대롱 매달아두더라. 떠있는 발이 그리는 포물선의 폭이 얼마정도로 걷고 있던 거지. 걷는다? 그래 분명한 건 지금의 행위가 걷는 거였구나.


 계속 걷는다. 어떠한 의식도, 질문도, 대답도 없이 걷는다. 내 걸음걸이를 촬영해서 머이브릿지처럼 내기나 해볼까. 나도 내가 어떻게 걷는지 모르니까 확률은 반반일 터이다. 내 걸음 혹은 자신의 걸음에 확신을 가진 사람 또한 없을 테니 반반의 확률은 틀림없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문득 걷는 방법을 잊곤 한다. 어색하다. 2족 보행의 역사가 내가 살아온 삶의 몇십만 배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걷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순간이 있다.


 그때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진다. 그저 걷는 방법을 잊어 버려서뿐만은 아니다.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여기가 어딘지는 더욱이 알 수가 없다. 그 순간은 모든 게 낯설다. 어제 도서관을 가기 위해 육교를 건너며 이 모든 생각과 감정이 스쳤다. 육교를 오르다가 내려가는데 그 자리에 오기까지 집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분명 탔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육교를 내려간다는 건 분명 육교를 올라왔기 때문에 가능한 건데 나는 의식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걸어왔던 걸까. 내가 걷고있긴 했던 걸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어디로 걷고 있었나. 날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떠미는 존재라도 있기 때문에 의식이 부재하더라도 발과 땅이 알아서 밀고 당기며 여기에 날 당도하게 했던 걸까.


 걷는 행위가 익숙해서 그 절차에 무감각한 만큼이나 걸어온, 그리고 걸어갈 경로에 대해서도 딱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곤 한다. 가끔 느껴지는 생경함을 스스로 억제하는 건 이를 압도하는 불안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제에서 벗어나 불안을 맞닥뜨릴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페이지로 빨려들어간다. 미도리가 묻는다."지금 어딨어?" 와타나베 아니, 와세나베는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곳이 어딘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디랄 것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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