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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Apr 16. 2020

#나의취준일기 당신의 오늘에 대해

2019 SBS 드라마 PD 작문

2019 드라마 PD (SBS)

 당신은 오늘 어떤 이유로 어떤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휴게소에 잠시 들렀는데 어떤 이유로 1시간 뒤 휴게소를 떠나 출발지로 돌아왔다. 당신의 오늘에 대해 자유롭게 작문하시오. (서두에 제목을 붙일 것)


[봉사의 문턱]

 

 나는 마스크 2장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따라 내 몸이 하찮게 여겨진다. 멀쩡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에 괜스레 슬퍼진다. 나오던 기침마저 쏙 들어갈 정도로 힘이 빠진다. 4시간 전 서울에서 짐을 챙겨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자긍심에 도취돼있었다. 시민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남을 도와야지! 트렁크를 세게 닫으며 대구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일주일 전 대구에서만 하루 200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 다른 지역에도 고르게 퍼졌지만 대구, 경북의 상황은 압도적으로 심각했다. 인력과 시설 부족이 연이어 보도됐다. 나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에 전화했다. "대구요. 저는 서울보다 대구에서 봉사하고 싶어요." 다행히 의료 자격증이 없어도 자가 격리자 관리 등의 업무가 있다는 답을 받았다. 집에는 친구 집에서 3주 동안 소설을 쓰고 온다고 둘러댔다. 일주일 동안 봉사하고 2주 동안 자가 격리하면 딱 3주였다. 통화를 마친 후 1주일이 지난 오늘, 대구를 갔다.


 대구를 도착할 때쯤 마지막 휴게소에 들렀다. 휴게소에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있었다. 텅 빈 풍경이던 대구와 달리 휴게소는 북적거렸다. 나와 같은 자원활동가들이 몰렸거나 의료진, 언론인 등이 들른 것 같았다. 새삼 감탄하며 편의점으로 가는데 약국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줄 끝엔 팻말이 놓여 있다. '휴게소 식당 영수증을 제시하면 마스크를 두 장 드립니다.' 대구에 몰린 마스크 구호품이 근처 휴게소 살리기로 사용되던 것이다. 거의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만큼 줄이 길게 늘어섰다. 휴게소 살리기란 취지에 반기를 들기 쉽진 않겠지만 거부감이 들었다. 저 마스크는 취약계층에게 가야 하는 게 아닌가. 봉사에 마스크가 필요할 수 있으니까 일단은 긴 행렬에 합류했다. 거부감을 휴게소 우동과 함께 삼켜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앞에 열 사람 정도 남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중앙자원봉사센터 대구지부 번호였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무슨 일이지. "당일날 죄송해요. 아무래도 의료 봉사 아니면 하실 일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요." 의료 관련이 아닌 일엔 대구 내 봉사자로도 충분하단 것이다. 봉사의 문턱이 이렇게 높았었나. 이 재난 상황에서 도움이 될 능력이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데 우겨서까지 갈 수도 없다. 난 봉사의 서류전형에서 탈락한 셈이다.


 나는 기름값과 맞바꾼 마스크 두 개를 조수석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긍심은 무력감으로 바뀌었다. 라디오에선 코로나 관련 보도가 이어졌다. 요양병원에서의 집단감염이 보도됐다. 후..또... 연이어 취약계층이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는 상황에 대한 격앙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귀가 빨개진다. 휴게소에서 느꼈지만 삼켰던 그 거부감과 비슷한 것이 다시 올라온다. 내 봉사정신이 하찮게 여겨진다. 감정이 고조되다 못해 울먹이는 인터뷰의 끝은 이랬다. "차라리 취약계층이 더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취약계층은 바이러스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에요. 원래, 항상, 꾸준히 우리 주위에 있었어요." 난 자원활동가가 아닌 영웅이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무력감이 죄책감으로 퍼졌다.


 오늘따라 차창 너머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요양 병원, 보육원, 장애 복지관, 유기견 센터 등등, 원래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아니 보려 하지 않던 건물과 안내판이 보인다. 봉사의 문턱은 낮았다. 너무 낮아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선을 바꾼다. 내비게이션 버튼을 눌러댄다. "목적지를 다시 설정하시겠습니까?" 버튼을 누르기 전 조수석에 놓인 마스크에 시선이 닿는다. 집에 미리 구비해놓은 백 장에 가까운 마스크가 떠오른다. 난 버튼을 누른다. 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이끄는 곳으로 가야겠다. 시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방법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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