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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Apr 18. 2020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비하하고 있다면?

언어의 가림막 너머의 차별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란 발언 탓에 지난 7일 제명 당한 미래통합당 전 후보가 있다. 그의 발언 덕분에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재확인하고 있다. 장애인이라는 비유가 여전히 욕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발언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당 발언은 두 가지 질문에서 분석됐다 1) 왜 장애인에 노인을 비유했는가  2) 왜 장애인 비유는 비하표현이 됐는가. 우리는 두 번째 관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비명의 볼륨을 키우기 위한 작업이다. 그래야 비하표현 자체가 누군가의 차별을 딛고 서있다는 걸 직시할 수 있다.


 주로 1)의 관점에서 노인 비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제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도 1)에 근거한 비판이다. 그가 세대론에 입각해 3,40대를 비난하고 폐지된 장애 등급제를 거론했다는 점에서 지역을 대표할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순 있다. 그러나 문제시된 발언,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가 취지와 무관하게 노인을 장애인과 동급으로 여겼다는 것만으로 비판을 받는 건 부당하다. 그의 발언은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아프기 때문에 장애인 체육 시설을 노인도 사용할 수 있게끔 다목적으로 지어야한다는 주장에서 등장했다. 


 2)'왜 장애인 비유는 비하표현이 됐는가'의 관점에서 은폐된, 그래서 더 유의미한 문제를 포착해낼 수 있다. 그는 나이 먹을수록 장애인이 된다는 말만 잘라서 내보내는 건 '악의적 왜곡'이라고 항변했다. 기사 제목은 그의 발언을 '말실수'라고 가리켰다. 해당 발언의 맥락을 제거한다하더라도 왜 '말실수'로 쓰여야 하고 사과를 하고 결국 제명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할까. 장애인과 동일선 상에 위치하는 경험 자체가 모욕적이라는 공감대가 기저에 깔린 것이다. 아니 나보고 감히 장애인이라고?  아니 어르신들 보고 감히 장애인이라고? 아니 내 미래를 보고 감히 장애인이라고?


"나이들면 장애인" 또 말실수 ... https://news.joins.com/article/23749423#none

     

 어떤 용어를 비하표현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 대한 차별이 될 수 있다. 이는 장애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MBC 시사교양 PD 작문 제시어 중 하나는 '커밍아웃과 함께 동성결혼을 부모님께 설득하는 편지쓰기'였다. 응시생들 사이에서 실제 성소수자에게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런데 그 비판이 '본의 아니게' 폭력을 야기한 것처럼 보였다. 성소수자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기에 더 유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 경험할지도 모를 순간에 대한 예행연습도 됐을 수 있다. 오히려 성소수자에겐 일상의 일부인 것을 마치 끄집어내지 말아야하는 순간처럼 바라보려는 시각이 반영된 시각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혹은 그 중 일부는 성소수자가 되어보는 체험 자체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제시어가 일으킨 폭력은 작문(필기 시험) 이후 채용 과정에도 이어졌다. 임원 면접에선 작문을 두고 본인 이야기냐는 질문이 나왔다고 한다. 클로짓 퀴어였다면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폭력적 순간이다. 게다가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의 반응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갈무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마치 그 시선 자체가 가치중립적 질문이 아닌 범죄에 대한 의심을 받은 것처럼 대답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성애자..입니다ㅠㅠ" ㅠㅠ를 보며 ㅠㅠ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니오'라고 담백하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관점에서 제시어에 대판 비판이 있던 거라면, 즉 실제 이야기라 오히려 더 마음껏 글을 쓰지 못할 성소수자에 대한 걱정이었다면 응시자들의 비판이 유효할 수 있겠다.


      

 악의 없는 차별은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몇 달 전 모욕을 당해 경찰서까지 간 적이 있다. 결국 증거 부족으로 합의를 봤다. 가족 안부를 묻고 내 미래를 걱정해주던 친절한 폭언을 담지 못한 게 한이다. 증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늦게나마 녹취한 결과물에는 '야 이 장애인 새끼야'가 있었다. 이를 가지고 모욕죄로 계속 끌고갈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악의가 없다는 핑계로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재생산할 수 없었다. 가해자에게 진 느낌이 들어서 아쉽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고민했던 찰나를 반성할 따름이다. 증거부족이 적절한 그리고 마땅한 결론이었다.

   

비슷한 색으로 보이는 네 가지 블럭이 있다. 네 가지 색을 blue로 부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goluboy/siniy 로 나누는 사람들의 뇌의 반응은 다르다.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언어라는 가림막때문에 안 보이는 것들이 있다. ‘blue’를 쓰는 미국 영어권 국민들은 네 가지 색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 했다. 뇌에 별다른 반응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네 색을 ‘goluboy’와 ‘siniy’로 분류하는 언어를 가진 러시아인에게는 뇌의 변화가 관찰됐다. 누군가에겐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언어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고 절대적 기준도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차별하고 있지 않단 보장이 없다. 가림막 너머의 차별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할 책무는 방송과 정치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무일 것이다."





https://www.yna.co.kr/view/AKR20200407146200001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37563.html

https://www.youtube.com/watch?v=RKK7wGAYP6k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 | Lera Borodi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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