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참여/감상/목격
관찰과 목격
관찰이라는 말 대신 목격이란 말을 즐겨 쓰기로 했다. 시작은 '관찰'이라는 말이 장르화됐다는 느낌이었다. 다이렉트시네마와 동일시되는 '관찰영화'는 어떤 조건들을 나열시키는 양식이 되었다. 관찰영화라는 언표가 관찰을 지우고, 관찰이라는 말이 담은 본래 목적을 압도한 느낌을 받았다. 일부 감독은 자신은 관찰영화를 하지만 기존의 관찰영화와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면서 자신의 양식을 조건화(소다 카즈히로 등)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양식화. 관찰에서 벗어날 순 없을까.
재현은 거리두기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그렇다면 그 거리두기를 관찰로 명명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삼는 다큐멘터리스트는, 말 그대로 '관찰자'에 위치된다. 즉, 관찰을 재현의 주요 수단으로 여기는(그렇게 명시하는) 이들은 사안의 바깥에 위치함으로써 스스로를 덜 연루되는 위치에 놓는다. 재현과 분석에 거리감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관찰자는 거리감을 일정 수준 이상 좁히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관찰자에 위치되고 싶단 의지는 일정 수준 이상 침투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 혹은 '거리'를 둠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주장에 가깝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거리'는 꼭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관찰자는 아니구나. 아니고 싶구나.
다큐멘터리 수업을 듣다보면 재현 윤리에 대한 고민을 나눌 때가 많다. 누군가 화두를 던지면 각자의 고민이 정적없이 튀어나온다. 고민한다-안한다 논의는 불필요하다. 모두가 고민한다는 전제 위에서 고민과 질문이 구체적 맥락 위에서 오간다. 그리고 늘 정답 없는 상태와 고민의 필요성으로 논의가 일단락된다. 기억에 남는 논의는 어떤 고민이 더 복잡하고 우수한지 따기지보다 그 맥락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이다. 고민을 들어주는 자리랄까. 그런 자리에선 종종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12월 초에 발견된 말-생각, '증언을 증언하기'. 아, 나는 연루되고 싶은 곳에 반응하는구나.
이 과정을 거치며 현재로선 '목격'이란 말로 작업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거리두기를 통한 관찰은 그 나름의 의미(관객과 관찰자 사이의 태도 차이에서 추출 가능한 의미)를 지니지만, 무엇과의 거리두기로써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 '참여'란 말-행위도 비슷하다. 재현 주체의 위치는 바깥으로 설정된 채, 일시적으로 경계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셈이다. 참여관찰이란 말에 의존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그럼 '목격'은 뭐가 다른가. 목격자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목격자는 그 나름의 위치를 가진 채 사안의 일부가 된다. 목격은 이제 관찰이나 참여가 될 수 없다. 행위자의 위치가 바깥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격자와 사안과의 거리는 계속 바뀌겠지만, 경계 안에 들어와 있다.
이미 우린 알게 모르게 목격하며 살아간다. 보고-듣는 행위를 관찰이나 감상이 아니라 '목격'이라 부를지는 콘텐츠가 아니라 수용자에게 달려 있다. 이미지가 그 자체로 실재하는 세상에서 콘텐츠 감상의 다른 이름은 '목격자 되기'일지도 모르겠다. 관객과 목격자는 다른 위치에서 동일한 것을 본다. 태도와 의지 혹은 관심의 차이가 '본 것'을 다르게 위치시킨다. 결국 '동일한 것'은 없어진다. 이런 이유로 관찰/참여/감상/목격 등의 구분이 단지 말장난으로 보이진 않는다.
조금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나의 삶에 어떤 일을 들이기. 목격자로서 세상과 관계 맺기. 이 맥락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건 관찰보단 목격에 가깝다. 무언가의 당사자도 자기 삶에 대한 목격자일 수 있겠다. 그럼 이제 질문이 바뀐다. 목격한 상황/증언을 어떤 방식으로 목격/증언할까.
목격을 목격하는 무구한 목격을 목격하며, 목격 과정을 전시함으로써 목격 당하며 바깥과 연결되기.를 목격하기.를 내놓음으로써 목격 당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