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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Jan 09. 2020

혼자여도 괜찮은데 그곳엔 언제나 다른 '혼자'가 있어

#혼자가혼자에게 #이병률 #2019

책의 제목에 책 내용이 이미 전부 담겨 있다. "혼자가 혼자에게"

너도 혼자. 나도 혼자. To 혼자. From혼자. 우리는 혼자. 

그래서 혼자이지 않는 혼자. 혼자를 만끽할 수 있는 혼자.

'혼자여도 괜찮은데 그곳엔 언제나 다른 '혼자'가 있어.'



 뒤에 써있는 왜 혼자냐고요. 괜찮아서요.가 처음과 끝에서 다르게 읽혔다. 책은 시종일관 혼자이고 싶지 않아했다. ‘혼자가 혼자에게’ 건넨 말은 혼자여도 괜찮긴하지만 타인과 어울리면서 얻는 즐거움과 따뜻한 온도도 상당하다는 것 같다. 혼자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책으로 끌어온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주를 이룬다. 중국 만두집에서도, 종점 버스 여행에서도 항상 사람이 있다. 작가 말대로 사람에 대한 냉소가 묻은 홀로가 아닌 혼자서도 괜찮아서 혼자인 사람이 혼자 여행하고 혼자 글을 쓰며 혼자 살아가며 만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이야기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병률 시인은 여행 에세이로 이미 꽤 유명했다. 이번 책도 여행 에세이라 부르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여행하며 만난 사람 그리고 느낀 온도에 관한 글이라도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여행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일상을 치열하게 살지 않아서도 있겠지만 글에서 나온 것처럼 여행을 치열하게 다녀올 만큼의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혹은 자기계발이 스며든 여행에도 거부감이 든다. 이국을 가야만 새로운 자극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여행이 성장의 프레임으로 조각 혹은 난도질 당해 장신구가 돼버린 건 아닐까.


 나에게 여행은 비일상이자 일탈이다. 여행은 비일상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비일상과 일상의 상호작용을 위해서 비일상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싶다. 그런데 여행이 일상, 일상이 여행이라면? 애초에 이런 거부감을 지니고있어서 그럴진 모르겠지만 여행을 일상과 연관한 비유 또한 식상했다. 물론 일상을 여행처럼 대할 필요는 있겠다. 일상 곳곳에 숨은 비일상을 찾아내는 일종의 숨은그림찾기랄까.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가끔은 여행 같단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서울로 여행을 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차이는 물리적 거리나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보다는 집을 떠나는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 같다.


 시인의 산문집을 피면은 응당 기대하는 바가 있다. 비슷한, 그러니까 흔한 경험에서도 새로운 관점을 투여해 내 일상을 흔들어줄 거라 기대한다. 두근거리는 손끝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런데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비틀어 끌어오는 건 나, 그러니까 독자의 몫이어야 했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컴퓨터나 태블릿 앞에서 타자를 치는 나의 하루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내기엔 역부족했다. 경험 자체가 지닌 특수성에 비해 녹아든 관점은 내 동공을 뒤흔들지 못 했다. 정교화됐다기엔 이미 많이 쓰이는 일상을 여행처럼과 같은 문구가 시인이 쓴 산문집에 등장하는 건 좀 아쉬웠다. 내 시선이 피상적이라 행간을 못 읽어낼 가능성도 짙다. 혹은 내 일상이 작가의 일상과 괴리가 큰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든 결과적으로 기대의 꼬리표를 끊지 못 했다. 옷에 붙어있는 작은 꼬리표지만 전체를 잡아먹듯 실망이라는 꼬리표는 책을 향한 기대를 삼켜버렸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일기 같았다.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의 마지막쯤엔 공개일기와 산문집에 관한 생각이 적혀있다. 일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글쓴이의 생각이 들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만 알고 있어도 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굳이 공개적으로 쓸 때엔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너그러움과 호기심을 갖고 대해준다. 나는 심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책을 대할 때 그다지 너그럽지 못했다. 자신이 겪은 경험 전달에서 나아가 나의 심장을 건드리진 못 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제낀 느낌이랄까.




 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우린 누군가를 항상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기다리려면 대상이 있어야한다. 혼자 하지만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기다림이다. 게다가 기다림의 대상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야한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기다리는 건 의자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닦는 것처럼 굉장히 적극적이고 부지런해야한다. 또 기다림의 대상이 사람만 해당되는 건 아니겠다. 내가 꿈꾸는 미래, 사회, 나 스스로 등이 머지않아 올 수도 있겠단 기대가 담긴 준비자세가 바로 기다림 아닐까. 여기서 등장하는 니체. 오직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만 우리는 기다렸다 말할 수 있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운좋게 누군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가져본다.


 이 책의 혼자는 하나의 주체를 형상화한다. 혼자가 괜찮은 이유는 소위 '혼자경영'이 주체성의 확보를 가리킨다고 어느 순간 받아들였다. 그렇게 혼자 주체적으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는 정서가 수반되고 그 정서에 대한 묘사가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중엔 역시나 사랑이 선두를 달린다. 개인적으론 사랑 얘기를 흥미로워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론 매번 아쉽다. 우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어하는 이유는 사랑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어떻게든 다른 선을 그어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랑없이는 못 사는 삶이 전제되는 이유는 사랑이 그만큼 강력한 정서라는 걸 방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사랑과 같은 가파른 정서를 수반하는 관계에 연인 말고 친구가 올 순 없을까. 책에서 언급되는 사랑의 모양(The Shape of water, 2017)에 비해 사랑 그리고 여타의 감정들에 대한 전방위적 접근이 없다는 건 사랑 얘기에 매번 느끼는 결핍감이다. 이 책을 덮을 때도 비슷한 아쉬움이 새어나왔다.


 우정은, 혹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떠도는 감정들은 호명되지 않았단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당하곤 한다. 우정 나아가 그 경계감정들에 대한 현상학이 필요한 건 아닐까. 불행을 파헤치기 보다 행복을 샅샅이 뒤지듯 우정보단 사랑에 목말라 있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 의문이다. 행복의 모양이 결정돼있듯 사랑의 형태, 방법, 대상까지도 전체 속에서 형상화돼있고 그걸 좇는 건 수긍할만한 일인가. 우 사랑과 관련해 적은 두 문단엔 의문형이 많다. 감정의 정치를 깨는 현상학의 첫 단계는 물음이니까. 사랑은 유일한 무엇이 아니다.




 가끔 SNS에 던져진 말들 중 인생 어차피 혼자 사는 것과 비슷한 방향의 이야기를 볼 때가 있다. SNS가 아니라 내 머릿 속, 입 언저리에 등장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보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인생을 혼자 살 순 있어야 돼. 가끔은 혼자가 되니까. 근데 그 흩어진 혼자가 뭉쳐서 만들어지는 게 인생 아닐까. 나의 인생도 그 중 하나로 얽여 있을 테다. 문화심리 논문에서 접한 자아 개념 중엔 knotted self가 있었다. 얽히고설킨 자아라고 번역하고 싶은 이것은 절대적 혼자는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논문의 끝은 이렇다. What a social world!


 여행과 혼자는 닮은 구석이 있다. 잠시 일상을 떠나 여행을 다녀오는 것처럼 혼자도 다시 돌아올 혹은 새롭게 다가올 만남을 준비하는 상태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 혼자가 혼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잠시 혼자여도 괜찮아 정도가 아니었을까. 혼자는 여행이자 인기척의 기다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혼자 있는 시간은 미래와 연결돼있다."(123쪽) 후배 시인으로 책에 등장하는 박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의 한 대목으로 감상을 마무리하려한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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