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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Sep 17. 2019

쓸쓸함을 기대하는 사람의 이야기


나는 어중간한 사람이다. 성공할 땐 넉넉하게 성공하고, 실패하면 아쉽지 않게 실패한다. 잘하는 것은 없지만 이것저것 못하는 것도 없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하자고 늘 다짐하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 한 것은 없고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던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물론 선택지가 단 하나로 남겨질 때까지의 모든 상황은 자잘한 과정들이 만들어낸 다른 선택들의 산물이었겠지만, 마지막에 가서 내가 결정할 선택지가 단수라는 것이 늘 내게는 불만이었다. 이런 내가 싫어서, 그리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이번엔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잘해보자’라고.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의 문제고 난 상당히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빈틈을 보여주기 싫어서 ‘난잘 살고 있어요’ 위장하고 있을 뿐, 남이 없는 나는 많은 시간을 땅바닥에 붙어있는 것에 할애하는 스물아홉의, 죽어도 하기 싫은 가업을 억지로 이어받은 어중간한 사람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어야 하겠지만, 그래야 난 정말 무능하고 노력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느끼고 절박함이라도 느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곧 잘한다. 운동신경은 적당히 좋아서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어울릴 만큼 모든 운동을 곧 잘 따라 한다. 음악에 재능도 없고 원리도 잘 모르지만 어릴 때 접한 기타를, 코드만 있다면 어떻게든 칠 줄은 안다. 노래도 음을 잘 못 잡아서 음치라는 소리를 곧 잘 듣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교회에서 찬양팀 리드 싱어나 성가대를 시키는 것을 보면 아주 못하지는 않은 것이 확실하다. 공부라고 다를까. 공부를 잘 하진 않았지만 지역 내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가는 자사고에 입학했다. 졸업할 때까지 하위권 성적을 꾸준히 유지했고 그저 그런 수능에 그저 그런 재수, 그저 그런 대학에 들어갔다.


(C)2019. 손예슬 all rights reserved.


이런 나지만, 서른을 약 5개월 앞두고 남들이 생각하기에 ‘노력’ 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해냈다. 책을 출간한 것. 물론 오랜 시간을 글 쓰는 것에 투자하긴 했지만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뭔가 더 거창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분수에 맞지 않은 칭찬과 격려를 듣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단지 결정이 순탄치 않았던 여행을 다녀왔고, 그 여행에서 일기를 썼으며, 여행을 다녀와서는 과거의 기억들이 그저 추억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쉬워서 조금 더 자세한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을 사진이나 그때 쓴 일기를 보며 썼기 때문에 단지 21일의 여행만으로 200페이지 분량의 책이 완성됐다.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뭘 해도 어중간했던 나를 칭찬해준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칭찬을 받게 해 준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글이라는 것은 내게 허세를 더 허세롭게 만들어주기 위한 얄팍한 끼에 불과했었다. 내 허세를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드는 썩 괜찮은 재주였다. 그러다가 차츰 허세보다는 글 자체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밌다고 해 주었고 꾸준히 읽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어쩌면 꿈이라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만족도 중요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어떤 부산물을 얻게 됐고, 참 다행히도 그것은 내 인생에 나, 또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어중 간하게 시도 당했던 것들 중의 일부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애착을 가지고 있는, 어쩌면 재능이라고 불려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여서 참 다행이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책임감도 조금 생겼다. 준비가 됐건 그렇지 않건 간에 난 이제 책을 펴낸 작가다. 아직 이 타이틀이 자랑스러울 만큼 자신감이 있지도 않고 사실 많이 부담스럽고 부끄럽지만 이 부담이 책임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요즘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가진 작가들의 정신적 상태와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문제다. 그들은 생각보다 자주 쓸쓸한 사람들이었다. 감정이 그들에겐 폭탄과 같아서 한번 터지고 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다. 그리고 그 미로 속에서 주옥같은 문장과 글이 탄생한다. 내게 다가오는 그들의 감정의 수준은 우울함이나 슬픔 그 이상이었다. 마치… 그미로는 그들에게 사무실처럼 느껴졌다. 출근하기 위해 기상하고 준비를 하는 것은 감정의 고립에 빠진 상태, 교통수단을 이용해 출근하는 것은 감정의 고립 속에서 3인칭으로 자신을 발견한 순간, 사무실에 도착해 일을 하는 것은 3인칭이 되어 발견한 자신을 서술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감정이 만들어낸 ‘작업공간’에 갇히는 것이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모든 작가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창작활동을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할 만한 글은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듯하다.

그런데 나는 감정에 갇혀 있는 시간이 어색하기만 하다.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다. 당연히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수 없기에 때때로 어찌하지 못할 우울하고 슬픈 감정들이 일지만, 이내 긍정적인 무언가가 그 감정들을 삼켜버리거나 졸음이 방해한다. 감정의 고뇌는 곧잘 수면을 방해하는 무한대에 가까운 카페인처럼 보이지만, 왜, 카페인에 이상하리만치 반응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나다. 물론 때때로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이 만족할 만한 감정의 묘사와 글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불현듯 왔다가 떠나가는 그대가  야속하기만 하다.


모든 것이 어중간한 나에겐 이 ‘쓸쓸함’마저 어중간하다. 좋은 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지 않은 순간도 있었지만 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다.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대~충 흘려버린다. 슬픔도 우울함도 기쁨도 어떤 만족도 불만족도. 평점심을 유지하게 하는 호르몬이 뇌에서 분비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렇게 단순할 수 없다. 이 단순함은 작가와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기에 좋아만 보이는 이 단순함이 내겐 무엇보다 큰 골칫거리다.


(C)2019. 손예슬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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