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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Sep 10. 2019

저마다의 사춘기

괜히 울적한 밤이다. 사실 괜히는 아니지만. 이유가 있지만 그렇게 쓰는 게 멋져 보인다. 이런 걸 허세라고 하겠지. 영화를 한편 봤다. 그래서 울적하다. 번역하는 사람은 왜 제목을 그런 식으로 번역했는지... 영화는 참 좋았는데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제목이다. 지랄발광 17세가 뭐냐... The Edge of seventeen. 어째서 저런 식으로 번역됐는지 모르겠다. 위기의 17세 뭐 이런 식상한 제목보다야 눈길이 한번 더 가지만 손길이 가진 않으니 그다지 좋은 번역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난 어려서부터 철이 들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는 걸 봐서 그럴 것이다. 더군다나 둘째 누나가 사춘기를 거하게 나시는 바람에 나까지 비뚤어질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내 삶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으로 보답하지 않았다. 그런 보답은 결국 내가 잘나야 하는 거니까. 당장에 버팀목으로, 아니 그땐 어려서 버팀목 까진 아니더라도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크는 나무 같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사춘기의 절정에 있을 나이였지만 철이 들어 애늙은이 같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애는 애였다. 한쪽으로 올곧게 자라서인지 다른 부분에서 잡음이 많았다. 겉이든 속이든.


17세 여자아이. 그것도 외국문화에서 겪는 10대의 사춘기에 공감을 하다니. 스스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오히려 바르게 자랐기 때문에 일탈에 대한 욕구가 큰 것 같기도. 아마 술이나 담배를 지금에서 시작한다면 누구보다 달콤하게 빠져들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겪어보고 싶은 세계다. 다른 세계로 치부해버릴 만큼 나와 다른 삶인가 싶다가도, 이 영화를 비롯해 일탈을 다룬 대부분의 미디어가 분명 내게 미지의 공간에 존재하는 판타지로 다가오니 완전히 맞는 말이다. 나이 스물아홉에 일탈에 대한 동경이 일어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사실일 수 있다. 이 나이 먹도록 클럽 한번, 원나잇 한번 한 적 없는 나를 두고 순수하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머저리' 라던가 그 언저리의 다른 말들로 나를 비참 또는 한심과 같은 수준의 단어로 나무랄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 달콤한 유혹에서, 특히나 이십 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지금, 삼십 대가 되고 나면 더 주저하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바르고 곧은 나무와 같은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이라 불리는 것과 누군가의 기대 때문이다. 신앙, 그리고 어머니와 가족들의 기대는 어쩌면 아직도 울타리. 어쩌면 여전히 인질과 같은 것이다.


일탈이라고 적어 놨지만 사실 난 담이 작아서 일탈을 해버리면 인생이 망하지 않을까?라는 행동 대비 지나치게 큰 반동을 걱정한다. 분명 내 안에서 정한 어떤 기준은 있겠지만 소소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탈의 즐거움. 그러나 그 즐거움보다 더한 두려움이 아직 가슴 안에서 콩닥거리고 있다. 어쨌든 이미 난 모범생의 이미지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학창 시절의 일탈을 다룬 미디어를 보면 내가 평생 가도 겪지 못할 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동경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그 정도가 지나칠 때는 훈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이건 아마 질투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비난하며 자책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건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들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이 마음은 나중에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겼을 때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로서 가지고 싶은 다정함으로 남아있다.


사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지랄발광의 17세의 열일곱 살 사춘기를 나고 있는 주인공보다 바르게 자란 주인공의 오빠에게 있었다. 동생이 일탈의 절정에 달했을 때 울화를 못 이기고 오빠는 자신의 심경을 처음으로 동생에게 고백한다. 어머니, 그리고 동생이 힘들어하는 모습 때문에 삐뚤어질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엄마와 동생에게 문제가 생기면 늘 집으로 달려와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를 갈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 기대 있는 사람들 때문에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런 오빠를 마냥 잘났기 때문에 걱정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동생. 주인공 오빠는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다. 그저 기다려주고 버텨주면 언젠가 그들이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설 때. 그때 자유를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행동을 마음대로 할 자유'라는 면에선 아마도 오빠는 동생의 삶을 어느 정도 부러워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자기는 제 한 몸 가누도 힘든데- 잘 나가는 오빠를 질투하며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다 느끼는 동생이나, 너무 책임 질 인생이 많아서 제 한 몸도 못 챙기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빠나. 서로의 모습은 서로에게 배부른 소리였을 테다. 주인공의 오빠에게 감정이입이 너무 심해서 자칫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한 번도 운 적이 없다'는 허세를 '일정기간 무료로 볼 수 있는 흔한 영화(절대로 영화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때문에  더 이상 부릴 수 없을 뻔했다.

(C)2019. 손예슬 all rights reserved.


결국 오빠는 동생에게 그런 심경을 고백한다. 고백하니, 동생이 변했다.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자신의 심경과 진심을 알아주는 동생이 변한 부분에서 말이다. 영화이니까 가능한 것이겠지. 사실 난 한 번도 누나가 변화할 것이라고 바라거나 기대한 적이 없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조금 더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철이 들었든 그렇지 않은, 어떤 삶을 살든 말이다. 여하튼 짐이었던 가족이 친구가 되는 순간이다. 보호자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라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어쩌면 일탈. 


진부한 소재로 내 마음을 잘도 긁어냈다. 조금 약이 오르기도. 리뷰가 돼 버린 듯한 오늘의 글. 오랜만에 영화를 통해 가족에게 바라는 내 속마음을 봐버렸다.


(C)2019. 손예슬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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