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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Oct 15. 2019

그런 날, 그런 글, 그런 책.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쓰려고 워드를 켰는데 아무것도 쓰지 못한 그런 날.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집에 왔다. 많은 작가들이 그렇다는데.


...


참, 나도 작가였지.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브런치에 이 공간에서 작가를 해도 되겠냐고 문의를 하고 평가를 받던 때에 작성했던, 저장해 놓았던 글이 다섯 편 있었다. 그 다섯 편의 글이 어찌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던지. 바빠서 글을 쓸 여유가 없던 때에는 저장해 놓았던 글 중 하나를 골라 다듬고 다듬어서 업로드했었다. 그러나 다섯 편의 글은 몇 편 밖에 쓰질 못했고, 남아있던 글은 아마도 다시는 들추어 보지 않을 휴지통이라는 저장공간에 보내졌다.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카페에서 썼다 지운 다른 수많은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글을 쓰지 못하는, 애써 써 놓고서 지우는. 쓴 글도 지우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쓰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이 전에 글을 썼을 때는 쓸 거리가 있을 때 글을 썼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날을 겪은 하루의 일기, 평소와 같지만 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 없을 때 쓴 고백, 유럽여행 중에 쓴 일기를 보고 그때의 일기를 더 자세히 쓴 각색본 일기. 때때로 썼다. 그런 종류의 글을. 그러나 보수가 주어진 일은 아니지만, 브런치는 나와의. 그리고 몇 안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내 글을 읽는 독자와의 약속이라 생각하기에 스스로 정한 시간 안에 글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존재하기에. 마땅히 소재가 없어도 써야 했다. 자주.


글을 쓰는 것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글을 쓰는 것엔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출간을 하고. 브런치를 시작하고 쓰는 것에만 몰두해왔다. 덕분에 문장이 깔끔해졌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 말을, 떠오르는 생각을 이전보다 잘 전달할 수 있게 됐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글에 깊이가 부족하면 쓰는 것도, 읽는 것도 금방 지쳐버린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노력만큼, 인생을 다양성에 노출시켜야 한다. 쓸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여행을 가도 좋다. 여러 가지 일을 해 보는 것도 좋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다. 다만 그럴 여력이 되지 않을 때는 책 만한 것이 없다. 책은 인생의 깊이를 가져다준다.


작가마다 문체가 있다. 글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구체적인 그 사람의 삶의 경험이나 생각들을 적어 놓은 비문학. 특히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대놓고 말해주는 (내가 주로 쓰는) 수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도 글쓴이의 느낌을 느낌 이상의 것으로 느끼게 해 준다. 전체 적인 글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하면, 그 글의 문체는 그 사람의 개성이다. 정해진 문법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문체가 한정적인 것 같지만, 작가마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다르다. 글의 매력이라고도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문체에 따라 글에 빠져드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글을 인내하며 오래 겪어야 그 글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들이 있다. 담긴 내용이나 깊이가 대단하지만 읽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글. 대표적으로 박경리 씨의 ‘토지’가 그렇다. 반면에 초장부터 사람을 휘어잡는 글이 있다. 구성이 탄탄하고 기승전결이 전부 흥미로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대작인 글도 있지만, 단지 문체가 뛰어나기 때문에 별 내용이 아님에도. 또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글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그렇다. (어디까지나 사견임을 밝힌다.)


‘토지’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둘 다 완독 하기가 매우 힘들었다(토지는 아직 2부까지 밖에 읽지 못했지만). 토지는 아주 긴 호흡이 필요한. 내용이 길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반면에 4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도 읽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토지는 3권을 지날 때 즈음 탄력을 받아 더 잘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반면에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번역을 잘한 것인지, 처음부터 술술 읽혔다.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기도 하지만, 문장들이 참 매력이 넘쳤다. 그럼에도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말장난하는 기분이랄까… 책의 내용에 빠져들지 못했고, 결국 겉도는 느낌은 책을 덮게 만들었다.

휴지통에 버려진 내 글을 보면서, 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보면서 문장이 중요한 만큼 내용도 중요함을 느낀다. 문장의 좋음이 좋은 문장을 많이 보고 글을 많이 써 보는 것으로 다듬어진다면 내용은 오롯이 인생의 경험에서 나온다. 내 글은 곧 나를 대변할 것인데. 아직 인생을 30년도 살지 못한 나의 글에 깊은 사골이 우려 질 리가 없었다. 고상한 척하는 조급한 마음만 있었을 뿐. 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서부터 편식을 해 왔던 것 같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책을 읽는 날. 한 달도 전에 샀지만 읽지 않고 가방 무게만 차지하던. 200쪽가량 남은 책을 마저 읽는 그런 날. 오늘 카페에서 하나의 문장도 쓰지 못했지만, 많은 문장을 읽었고 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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