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드나무 Jun 20. 2020

관심의 시대

고작 30년 인생이 말하는 인생학

관심은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 매력적인 이점을 가져다준다. 첫째는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돈을 벌어준다는 것. 이 과정에서 관심을 얻는 올바른 방향성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화두가 되어왔다. 오늘은 이 관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초등학생 시절 B의 집엔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책이 있었다. B의 집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갈 때마다 그 만화책을 읽곤 했다. 그 만화에는 사람의 전투력을 측정해 주는 스카우터라는 기계가 있다. 전투력이 너무 높아 측정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서면 폭발해버렸는데, ‘우와…’ 탄성을 지르며 ‘엄청나게 강하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 만화에서는 강함의 정도가 아주 중요한 주제였다. 이처럼 스토리가 있는 모든 이야기에는 중심이 되는 주제가 있다. 세계관을 아우르는 흐름 말이다. 드래곤 볼의 흐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였다. 악당이 등장하고, 악당으로부터 지구와 사람을 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싸움이 무조건 일어난다. 그 싸움, 전투가 주요 흐름이었다. 비단 이것은 가상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기별, 시대별 특징을 꼽아 그 시절과 세대의 흐름에 이름을 붙인다. 이념에 따라, 경제에 따라, 사건에 따라. 시대의 흐름을 관통하는 흐름이 바뀔 때면 우리는 어김없이 이름을 짓는다. 그래서 나도 이름을 지어봤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를 관심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내가 무슨 철학자도 아니고,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웬 그럴싸한 헛소리에 잠깐 멈추었다 간다 생각하고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늘 이 세상을 관통하는 세계관의 중심에는 인권과 자원이 있었다. 자원을 얻는 과정에서 효율을 위해 인권이 얼마나 침해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그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던 종교나 정치세력은 인권을 앞세워 힘을 얻었고, 규모가 커진 정치와 종교는 다시 자원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어왔다. (아 물론 순수한 신앙심과 나라를 위한 헌신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 또한 신앙심을 가지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청년이기에) 그만큼 자원을 얻는 수단에 관해 우리는 관심을 가져왔고 그에 관한 이런저런 스토리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는 IT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관심’ 자체가 자원을 얻는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얼마나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를 제공하느냐는 관심, 곧 재화를 얻는 중요한 포인트다. 그 과정에서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확실한 현실인 양 말하거나 거짓된 정보로 관심을 끄는 사람이나 매체가 있다. 그런 대상들을 폄하하며 부르는 단어가 바로 관종, 관심 종자다. 그들을 벌하는 대중의 처벌은 단연 무관심이다. 그리고 그 거짓의 수위가 크고 범법일 경우에는 다른 관심으로 그들을 처벌하기도 한다.


그리고 단순히 누군가가 받는 관심 자체가 불만인 사람이 있다. 그저 관심 자체가 불만이다. 질투가 이유일 수도 있고 단지 생각이나 사상 자체가 질병 수준인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이 받는 고통이 그들에겐 즐거움인 사이코패스일 수도. 질투심을 느끼는 사람은 관심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거짓일 것이라 단정 짓고 악의적인 관심을 표출한다. 그들에게 사실여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관심받는 사람이 관심을 받지 못했으면 좋겠고, 정말로 거짓된 사실이나 모습으로 인한 관심이라면 마땅히 사회로부터 매장당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아니 자신의 선동으로 거짓이 될 수 있도록 힘쓸 수도. 우리는 이들 역시 관종이라 부른다. 이들은 관심받는 사람에 대한 악의적인 행동으로, 역시 관심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진 악의적인 관심은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정치인처럼 관심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야 그런 악의적인 관심도 이용하지만은, 관심 자체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들에게 이런 악의적인 관심은 치명적이다. 관심에 목말라하는 사람일수록 악의적인 관심에 더 큰 상처를 받기 마련이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혼자서는 그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하나님도 아담의 혼자 있는 모습을 좋지 않게 보시고 하와를 만드셨을까. 다른 사람이 있기에 나의 정체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비교도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다른 사람이 규정하는 나에 대한 시선이 중요한 존재다. 그렇기에 요즘 시대는 마땅히 올바른 관심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문제가 어느 시대보다 많이, 심각하게 발생하는 시대다. 어느 정도까지가 올바른 관심인지, 어느 정도를 넘어야 오지랖인지 사람마다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 때문에 수치화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지만, 인륜 지사 역지사지. 피해받지 않고 피해 주지 않는 올바른 관심에 대해 한번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