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이유의 ‘낮은 물질(base matter)’
철학은 전통적으로 높은 것, 즉 이성이나 영혼, 이상(理想)과 같은 고귀한 가치를 탐구해왔습니다.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상위에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물질보다 우월하게 보았죠.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정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천하고 하찮다고 여기는 것들—흙, 땀과 피, 쓰레기, 심지어 배설물까지—그 속에야말로 존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타이유는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독특한 유물론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낮은 물질'(base matter, 프랑스어 matière basse)입니다.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 개념은 한마디로 가장 낮은 곳에 놓인 물질에 철학적 주목을 돌리는 시도입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기존의 주류 유물론을 깨뜨리기 위해 이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흔히 받아들여지던 유물론마저도, 바타이유가 보기에, 은근히 형이상학적 이상(理想)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과학적 유물론은 물질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결국 물질 세계를 수학적 질서나 개념의 틀 안에 가둠으로써 일종의 관념화를 행합니다. 바타이유는 이러한 틀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낮은 물질'은 어떤 높은 이념이나 목적에도 종속되지 않는 물질입니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반항적이어서, 우리의 철학적 체계가 설정한 높고 낮음의 구분 자체를 뒤흔듭니다. 요컨대 바타이유는 인간이 숭고하다고 여겨온 모든 가치의 기반을, 가장 천한 물질로부터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낮은 물질'이 기존 철학 전통과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흔히 육체보다 정신이 우월하고, 물질은 형상이나 이념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물질 세계는 고귀한 질서를 담지하거나 궁극적으로 정신에 의해 승화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헤겔의 변증법처럼, 낮은 것은 종국에는 높은 것으로 통합된다고 믿었죠). 그러나 바타이유에 따르면 이러한 위계적 구도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의 '낮은 물질'은 어떠한 개념으로도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원초적 물질성을 가리킵니다. 바타이유는 그것을 가리켜 "인간의 이상적 열망에 있어서 외부적이고 낯선 것"이며 어떤 숭고한 존재론적 체계에도 "감히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힘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낮은 물질'은 우리 머릿속의 관념이나 이상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의 요소이자 잔여물입니다. 이는 논리적 정의나 합리적 체계화가 불가능하며, 경험과 체험의 영역에 남아 있는 무엇이지요.
바타이유는 철학자들이 높이 떠받드는 이성적 질서가 사실은 발 밑의 하찮은 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음을 폭로합니다. 마치 건물이 튼튼해 보이지만 그 기초를 받치는 흙과 진흙이 흔들리면 건물 전체가 흔들리듯이, '낮은 물질'은 모든 철학적 구축물의 토대를 뒤흔드는 잠재력을 지닌 것입니다.
이렇듯 파격적인 사상이 형성된 데에는 바타이유가 놓여 있던 시대적·지적 배경과 여러 사상가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바타이유가 사상 활동을 펼친 1920~30년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혼란과 문화혁신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도덕과 질서가 흔들리면서, 예술과 철학에서는 초현실주의같은 혁신 운동이 등장했지요. 바타이유도 한때 앙드레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브르통과 결별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됩니다. (브르통은 바타이유를 가리켜 "배설물의 철학자"라며 조롱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타이유는 이를 오히려 찬사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초현실주의가 꿈과 무의식을 예술로 승화하려 했다면, 바타이유는 보다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충동—공포, 에로스, 혐오감 같은 것—에 주목했고, 미학적 형식마저 파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타이유에게 가장 큰 철학적 영향을 준 인물들로는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타이유 사상의 밑바탕에 깔린 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니체는 서구 전통의 도덕과 진리를 해체하고 힘과 생명을 예찬했는데, 바타이유는 이 니체적 유산을 받아들여 금기를 깨뜨리고 삶의 암흑面까지 긍정하려 했습니다. 예컨대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기존 가치를 전복했듯, 바타이유도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을 무화(無化)함으로써 새로운 성스러움을 모색했습니다.
다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영향도 중요한데, 이는 주로 "물질적 현실을 중시"한다는 점에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상보다는 경제적 기반과 노동을 중시하며 유물론을 전개했지요. 바타이유 역시 현실의 물질성과 인간의 육체적 조건에 천착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물론자입니다. 다만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이론을 따르기보다는, 소비와 낭비에 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저서 <저주받은 몫>에서 제시한 일반경제학 이론은 인간 사회가 생산뿐 아니라 과잉을 태워버리는 소비—예컨대 축제나 전쟁 같은—를 통해 유지된다는 파격적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한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도 바타이유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 원초적 본능과 금기의 긴장이 도사린다고 보았는데, 바타이유는 이러한 무의식의 어두운 충동, 특히 죽음충동과 성적 에너지에 철학적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실제로 바타이유는 '낮은 물질'을 가리켜 "죽음 충동의 분변학적 표현"이라고까지 불렀는데, 이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 본능 중 가장 파괴적이고 억압된 측면이 배설물 같은 형태로 표출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바타이유의 철학은 니체의 도덕 전복, 마르크스의 물질 현실 강조,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금기 분석이 한데 어우러져, 기존에 높이 평가되지 않던 영역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바타이유는 여러 지적 흐름을 두루 흡수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가톨릭 신앙에 심취했다가 후에 신앙을 버렸지만, 신비주의적 체험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저서 <내적 체험>을 보면, 신을 상실한 자리에서 극한의 황홀경(황홀한 고통이나 금기의 파괴를 통한)을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는 전통적인 종교의 맥락은 아니지만, 신비적 체험에 대한 일종의 세속적 탐구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타이유는 동시대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의 연구(예컨대 증여와 포틀래치의 개념)와도 교류하여, 원시 사회의 축제와 낭비 풍습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철학적 토론 상대 중에는 헤겔 철학의 대가 알렉산드르 코제브도 있었는데, 바타이유는 코제브가 이끄는 헤겔 세미나에 참석하며 변증법을 접했지만, 어디까지나 헤겔을 뒤집기 위한 재료로 삼았지요. 마지막으로 사드 후작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드는 금기 없는 방탕과 폭력을 소설로 그렸던 인물인데, 바타이유는 그를 "최고로 혁명적인 작가"로 여겼습니다. 사드가 벌인 상상적 범죄 행위들을 바타이유는 금지된 영역에 대한 탐구로 읽어냈고, 자신의 에로티시즘 이론에 참고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영향 속에서,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 철학은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잡다한 지식의 모험가였고, 따라서 그만큼 이단아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사유를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낮은 물질' 개념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 주변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바타이유 철학의 정수는 "높은 것 속에 낮은 것이 숨어 있다"는 역설에 있으므로, 일상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이러한 전복의 관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 신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육체와 정신을 나누어, 정신은 고귀한 것으로, 육체(특히 그 아래쪽 부분)는 낮게 치부해왔습니다. 바타이유는 이에 대해 통렬한 풍자를 한 바 있는데, 그의 짧은 에세이 <엄지 발가락>에서 이런 통찰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머리는 지성의 자리로 숭배되지만, 그 머리를 움직이게 하고 실제로 인간을 직립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발가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발 특히 발가락을 천시하고, "더럽다" 여겨 감추려 하죠. 바타이유에게 이 머리와 발의 관계는 곧 높음과 낮음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높고 깨끗한 정신이 우리를 이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육신의 하찮은 부분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발가락처럼 천한 것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의 기반이며, 이를 무시하는 것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듭니다. 바타이유의 말대로라면, 존재의 가장 높은 곳(머리)과 가장 낮은 곳(발)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으며, 낮은 곳 없이는 높은 곳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는 금기와 taboo의 영역입니다. 모든 사회에는 더럽다고 꺼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배설물, 시체, 피, 성적 일탈... 이런 것들은 일상적으로 숨겨지고 금기시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종교 의례나 축제에서는 이런 금기가 일시적으로 풀리기도 합니다. 예컨대 어떤 문화에서는 축제 기간에 온갖 음란한 농담과 행동이 허용되고, 카니발에서는 사회 질서가 뒤집혀 광기가 표출되지요. 바타이유는 이러한 금기의 위반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그에게 금기의 대상, 즉 '낮은 물질'에 해당하는 것들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매력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금기를 찢고 나갈 때 인간은 일종의 해방과 충만함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바타이유 자신이 쓴 소설 <눈 이야기>를 보면, 청소년들이 벌이는 충격적인 성적 일탈과 폭력이 묘사되는데, 이는 단순한 변태적 상상이 아니라 금기를 넘어선 곳에서 찾는 극도의 경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로티시즘의 탐구는 바타이유 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성적 욕망과 폭력, 신성모독이 한데 뒤엉킨 순간에 삶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성적인 쾌락과 죽음의 충동이 맞닿는 한계경험에서 인간은 일상적 자아를 넘어선 어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요컨대 성적 욕망이나 죽음처럼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끌리는 것들 역시 '낮은 물질'의 범주에 들어가며, 이를 정면으로 직시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통찰이 있다는 것입니다.
'낮은 물질'의 개념은 노동과 계급의 관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머리를 쓰는 지식인 계층이나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육체노동을 하는 서민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퍼뜨리곤 했습니다. 육체노동은 천한 것이고, 정신적 활동이 고귀하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도시의 하수구를 치우는 노동자나 농장의 거름을 뒤지는 농민이 없다면, 고상한 예술과 학문도 제대로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거대한 도시를 떠받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청소부, 배관공, 폐기물 처리자들입니다. 이처럼 사회를 유지하는 물질적 기반은 종종 투명인간 취급을 받지만, 실은 가장 중요합니다. 바타이유적 시선으로 보면, 이들 노동이야말로 사회의 '낮은 물질'이며,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사회의 기반은 취약해집니다. (마르크스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물질적 삶의 조건)"라고 말한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첨단 정보사회도 데이터센터를 식히는 냉각수와 전기, 그것을 관리하는 기술자들의 육체노동 없이 돌아가지 않듯이, 아무리 높은 지식산업도 결국 물리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마르셀 뒤샹의 1917년작 <샘>(Fountain): 일상적 소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내세워 전통 미학을 뒤흔든 기념비적 작품이다. 뒤샹은 천한 사물도 관점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경계를 묻는다는 점에서 바타이유의 문제의식과 통한다.
마지막으로 예술과 하위문화의 사례를 들어볼까요? 20세기 현대미술에서는 바타이유와 유사한 도전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로, 위 이미지의 마르셀 뒤샹(Duchamp) 작품 <샘>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가명을 서명해 전시한 것으로, 일상적이고 저속한 물건을 미술관에 세움으로써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뒤샹의 의도는 예술계의 권위를 조롱하고 예술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천한 물건에 담긴 낯선 힘을 드러낸 사례이기도 합니다. 소변기 같은 물건이 미적인 오브제로 격상되자 모두가 충격을 받았죠. 이는 낮은 것이 높은 자리에 놓였을 때 생기는 전복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바타이유가 말한 '낮은 물질'의 미학적 구현이라 할 만합니다. 이밖에도 현대미술에는 폐품이나 쓰레기를 활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같은 예술운동은 초라한 재료(흙, 천 조각, 돌멩이 등)로 작품을 만들며, 고급 예술과 일상 물질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겉보기엔 지저분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은 우리 시대의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빛나는 것만 쫓고 버려진 것은 외면하는가?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은 절대적인가?" 같은 물음들이지요. 펑크 음악이나 패션 같은 하위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찢어진 옷, 거친 소음, 반항적 언행 등은 주류 사회가 볼 때 비속하지만, 그 낮음의 미학을 통해 기성 질서에 도전하고 자신들만의 진실성을 표현합니다. 가령 펑크족이 찢어진 청바지와 안전핀, 채색된 머리로 나타났을 때, 이는 단순한 반항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천대받는 쓰레기라면, 그 쓰레기스러움 자체를 긍정해버리겠다"는 역설적 선언이었습니다. 이런 예시들은 모두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 사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 현상들입니다.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 개념은 그가 활동한 시대를 넘어, 현대의 철학과 예술, 사회 비판담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사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성찰하는 데 이 개념이 유효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우선 철학 이론 측면에서, 바타이유의 사상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자크 데리다는 바타이유의 영향 아래 해체 개념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하고 모호한 제3의 지대를 드러내는 전략인데,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도 바로 그런 경계 바깥의 영역을 다루었지요. 둘 다 기존 구조를 뒤흔드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abject)' 개념을 통해 혐오스러운 것들이 주체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는데, 이 역시 바타이유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현대 철학의 한 경향인 신유물론이나 객체지향 존재론에서도, 인간 중심 시각을 넘어 물질 자체의 활력과 주도성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인 베넷의 저서<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은 쓰레기나 작은 물건들까지도 자체의 생동과 영향을 가진 존재로 보자고 제안하지요. 이런 흐름은 바타이유와 정확히 같지는 않더라도, 물질에 대한 시선 변화라는 면에서 일맥상통합니다. 과거에는 하찮게 여겼던 물질 세계를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 분야로 눈을 돌리면,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 개념은 현대미술과 문학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1990년대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전시「L’Informe/Formless: Yve-Alain Bois와 Rosalind Krauss 기획」는 바타이유의 개념을 직접 제목으로 삼아, 형태 없는(material informe) 현대미술 작품들을 조명했습니다. 이 전시는 잔혹한 사진, 추한 조각, 뒤틀린 회화 등 기존 미학 기준으로는 낯선 작품들을 모아놓고, 그것들이 어떻게 미와 추의 경계를 해체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바타이유가 말한 "존재론적 감옥"을 부수는 미학이 실제 예술 창작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예술평론가들은 바타이유의 이론을 빌어, 현대미술의 파괴적·반형식적 경향을 설명하곤 합니다.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앵포르멜 회화 등 여러 사조에서, 정형화된 아름다움 대신 무정형의 물질감과 과잉, 파편화가 두드러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지요. 심지어 오늘날의 디지털 예술에서도, 완벽한 가상 미학 이면에 글리치(glitch)나 디지털 노이즈처럼 오류와 파편(일종의 디지털 '낮은 물질')을 활용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는 완벽하게 통제된 디지털 세계 안에 무질서의 요소를 들여와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술은 높고 순수한 것만 다루는 게 아니라, 낮고 더러운 것, 무의미한 것까지 포용하면서 스스로의 경계를 확장해 왔고, 바타이유의 사상은 그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사회 비판의 측면에서도 '낮은 물질'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현대는 흔히 소비 사회로 일컬어집니다. 우리는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 부산물로 엄청난 폐기물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편리함과 번영의 이면에 축적되는 쓰레기와 오염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지기 일쑤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은 바다에 떠다니며 거대한 쓰레기 섬을 이루지만, 도심에 사는 소비자들은 이를 쉽게 실감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높은 생활수준만을 향유하고 낮은 물질(쓰레기, 오염)은 의식의 바깥으로 밀어낸 형국입니다. 바타이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태도는 위험한 자기기만일 수 있습니다. 억눌린 것은 언젠가 돌아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감춰둔 낮은 물질은 결국 우리 앞에 문제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환경문제, 기후위기는 그동안 인류가 외면해온 낮은 물질들의 반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땅에 묻은 쓰레기와 대기 중의 탄소가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이제는 우리 삶의 터전을 흔들고 있지요. 이는 바타이유식으로 말하면, 그동안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의 높은 탑이 물질적 토대의 균열로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낮은 물질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쓰레기와 오염을 그저 혐오하고 숨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처리하고 순환시키는 일에 사회적 성스러움을 부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폐기물을 창의적으로 재활용하는 일이나, 자연의 흙으로 돌아가는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움직임 등은 모두 낮은 물질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인간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시선과 '낮은 물질'을 연결짓는 사회비평도 가능합니다. 가령 도시 빈민, 이민자, 하층 노동자 등은 종종 사회의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됩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번쩍이는 부와 번영이라는 건물 뒤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지요. 이들을 단지 제거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일부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타이유 철학을 빌리자면, 이들은 사회의 '낮은 물질'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근본적 작용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근의 사회비평적 예술이나 영화에서도 노숙인이나 빈곤층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문명사회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도 높음/낮음의 구도를 뒤집어 보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낮은 물질' 개념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깨끗한 것, 고상한 것을 추구하지만, 바타이유는 더럽고 하찮은 것 속에도 어떤 진실하고 강력한 힘이 도사린다고 말합니다. 그의 철학은 특정한 도덕이나 관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치 체계를 흔들어놓음으로써, 스스로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마련합니다.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현실과 접속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타이유의 사상이 주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환경위기, 사회적 불평등, 삶의 의미 상실 등 우리 시대의 문제들은 어쩌면 우리가 억눌러 온 낮은 것들의 반작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높은 탑 위에 앉아 아래를 굽어보는 대신, 탑 아래의 어둠과 그림자를 직접 내려가 살펴볼 용기를 가져야 할 때가 아닐까요? 바타이유는 불편함 속에 진리가 숨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낮은 물질'에 대한 그의 도발적인 사유는, 우리가 외면해온 세계와 화해하고 재구성할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결국 철학이란 이름 아래 높은 담론만을 쌓는 것이 아니라, 흙탕물에 뛰어들 용기를 내는 것임을 바타이유는 몸소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 물음이 독자인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낮은 곳'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물음에 답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