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태어난 공포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

by 새솔

* 해당 브런치북은 좀 더 친근한 인문학을 위해 보다 친밀한 어투로 작성되었으나... 하나도 안친근한 것 같습니다. 추후 추가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보충하겠습니다.


낯설고 불쾌한 것과의 조우 – 아브젝트란 무엇인가?


한 번쯤 우리는 속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순간을 겪습니다. 예기치 않게 썩은 음식을 보거나, 코를 찌르는 시체 냄새를 맡거나, 피투성이 상처를 보게 되면 엄청난 혐오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고개를 돌리면서도 이상하게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순된 매혹도 느끼게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이런 감정의 정체를 ‘아브젝트(abject)’, 우리말로 ‘비체(卑體)’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저서 <공포의 권력>(1980)에서 아브젝트를 “주체(나)와 객체(외부 세계)의 경계에서 밀쳐내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한때는 나의 일부였거나 친숙했지만 이제는 철저하게 배척되고 낯설게 느껴지는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더 이상 내 정체성 안에 포함될 수 없기에 경계 밖으로 쫓겨났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불쑥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존재입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아브젝트는 단순히 더럽거나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로 혐오스러운 게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건 “정체성, 체계, 질서를 교란하고 경계와 규칙을 무시하는 것” 때문입니다. 피나 오물, 부패, 구더기처럼 모호하고 섞여 있는 상태야말로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아브젝트의 본질이죠. 예를 들어, 피가 살아 있는 몸속에 있을 때는 생명의 상징이지만, 몸 밖으로 흘러나온 순간부터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 ‘더러운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때 우리는 극도의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고, 피를 ‘타자’로 밀어내면서 자신의 경계를 지키려 하죠. 즉, 아브젝트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선에서 나타나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존재인 셈입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인간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와 자기를 구분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독립된 자아로 서기 위해 어머니를 밀쳐내는 “어머니의 비체화”가 최초의 아브젝트 경험이라고 설명합니다. 나를 탄생시킨 어머니(또는 모성)을 거부하고 분리해냄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경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낯선 것들이나 불쾌감을 주는 것들을 끊임없이 배격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혐오감은 몸이 위험한 물질을 배출하려는 생물학적 반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으로 경계를 지키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크리스테바는 우리가 아브젝트를 마주할 때 두 가지 상반된 감정에 사로잡힌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구역질이 날 정도의 공포와 혐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끌림과 매혹입니다. 실제로 공포 영화나 잔혹한 예술 작품을 볼 때 역겨워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되는 이중적인 태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크리스테바는 이런 쾌감 섞인 공포를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부르면서, 사람들이 아브젝트에 “복종적이지만 기꺼운 희생자”가 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아브젝트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을 자극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 버렸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무언가죠. 그것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뚜렷이 말하기 힘든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서도 왠지 그 금기를 넘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죠. 이 모순적인 경험이 바로 아브젝트의 힘이고,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공포의 권력”입니다.


상징계의 그늘, 실재의 균열 – 라캉과 크리스테바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이론 뒤에는 사실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들이 그림자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라캉은 인간 심리를 크게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구분했는데, 이 중 상징계(le Symbolique)는 언어와 사회 질서의 세계, 그러니까 의미와 규칙이 지배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반대로 실재계(le Réel)는 말로 다 담을 수 없고, 우리 질서 바깥에 있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뜻하죠. 우리는 자라면서 언어를 습득하고 사회적 규범을 받아들이면서 상징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라캉에 따르면 그 밑바닥에는 항상 표현되지 못한 잔여물, 즉 실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테바는 이 실재가 아브젝트와 통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안전한 의미 체계 속에서 살다가 아브젝트를 마주치는 순간을 상상해 보세요. 그때 바로 라캉이 말한 실재계가 상징계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이 벌어집니다. 가령 화목하게 가족 식사를 하던 중 누군가 갑자기 피를 토하거나,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 현장의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일상의 질서와 의미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충격적인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라는 지붕이 뚫리면서 실재가 불쑥 얼굴을 내미는 순간인 셈입니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의미가 붕괴하는 장소로 나를 이끄는 것”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상징계 이전의 혼돈과 금지·규율이 생기기 전의 원초적 폭력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젝트는 라캉이 말하는 “1차적 억압”의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기도 전에 이미 어떤 것들을 억압하고 밀쳐내면서 주체가 되었는데, 그 가장 원초적인 억압의 흔적이 아브젝트로 남았다는 거죠. 앞서 말한 ‘어머니와의 분리’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독립적인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자기와 엄마(자연, 동물성 등) 사이에 경계를 그어야 했습니다. 사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여서, 인류는 스스로를 짐승이나 자연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여러 가지 금기와 의례를 만들어 왔습니다. 원시 부족의 정화 의식이나 금기의 범위가 “인간을 동물성의 위협으로부터 떼어내 문화의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다는 게 크리스테바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비체화(abjection)는 인간 정신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배제의 작업’인 셈이죠.


하지만 그렇게 바깥으로 밀쳐 낸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브젝트는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불쑥불쑥 나타나 우리를 위협하죠. 문명화된 현대인의 내면 어딘가에는 여전히 원시적인 공포가 자리해 있고, 깔끔하게 정비된 도시 풍경 뒤편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쌓인 뒷골목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아브젝트와 마주치는 경험은 늘 외상적(트라우마적)입니다. 그건 우리가 억압해 온 실재가 예고 없이 튀어나와, ‘나’라는 구축물을 흔드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균열 앞에서 우리는 자아의 붕괴를 겪습니다. 라캉이 주체를 떠받치는 ‘환상’이 깨질 때 찾아오는 것을 공포(anxiety)라고 불렀는데, 아브젝트가 주는 공포란 바로 그런 류의 공포입니다. 동시에 아브젝트 앞에 선 주체는 다시 한 번 자기 경계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는데, 밀쳐내고 구토함으로써 “나는 저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위협적인 혼돈을 겨우 몰아내는 거죠. 결국 아브젝트란, 라캉의 실재계가 드러나는 순간 느끼는 주체의 공포이자, 그 공포를 통해 상징적 질서를 다시 확인하려는 몸부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왜 아브젝트의 공포가 단순한 혐오감을 넘어서는 깊이를 갖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나’라는 존재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젝트 앞에서 우리는 인간 세계를 지탱해 온 언어와 이성이 눈 깜짝할 사이에 힘을 잃어버린다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원초적 감각 – 피와 살, 똥오줌의 세계, 살아 있음과 죽음이 기이하게 공존하는 상태 – 이 우리를 압도하죠. 크리스테바가 말했듯이, 아브젝트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어 어딘가 존재하는 금기적인 요소들이고, 그것들과 대면한다는 건 상징계 밖으로 발을 내딛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우리 내면 가장 깊숙한 진실, 문명으로 가려져 있던 인간성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스러운 더러움 – 바타이유의 저속한 것과의 만남


아브젝트의 영역은 사실 정신분석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아브젝트와 통한다고 할 수 있는 ‘저속한 것’, ‘낮은 것’의 세계를 철학적으로 파고들었거든요. 바타이유는 기존 철학이 높이 치켜세운 이성적이고 고상한 것들에 맞서, 사람들이 비천하고 추잡하다고 여겼던 것들 속에서 오히려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이걸 ‘낮은 물질’(base matter)이라고 불렀는데, 이 개념은 높음과 낮음의 이분법을 흔들어놓고 모든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깨끗하고 고결한 것과 더럽고 비천한 것의 구분을 허무는 걸 통해, 바타이유는 새로운 물질주의 철학의 지평을 열어보고자 했습니다.


바타이유 철학을 요약하자면 “저속성”이나 “타락” 같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똥, 오줌, 피, 정액처럼 사회가 터부시하는 배설물이나 신체 분비물, 웃음, 외설적인 언어, 포르노그래피 같은 것들에 주목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통적으로 ‘품위 없다’고 치부되어왔지만, 바타이유는 오히려 그 안에 숨은 강력한 에너지를 봤죠. 예를 들어 배설 행위는 단순히 생리현상 같지만, 동시에 자기 내부의 일부를 밖으로 던져내는 자아 붕괴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또 성행위는 쾌락을 주지만, 극한에 이르면 이성이 마비되고 자기 구분이 허물어지는 황홀경에 빠지게 되죠. 바타이유가 주목한 건 이런 금기의 초월, 즉 “탐닉과 타락을 통한 해방”입니다. 인간이 진짜 자유로워지려면, 사회가 ‘부정하다’고 밀어낸 그 영역과 대면해야 한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저속하고 어두운 심연을 통해서 오히려 더 숭고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와 바타이유의 생각은 서로 맞닿아 있어요. 크리스테바가 말한 “경계를 교란하는 것”은 곧 바타이유가 언급한 ‘낮은 물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바타이유는 종교의 기원을 살피면서도 숭고함과 더러움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지적했습니다. 예를들어, 원시종교의 희생제의나 금기를 보면 피와 내장이 난무하는 잔혹함이 있는 동시에, 그게 신성한 의식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이런 데서 더러움과 신성함의 경계가 생각보다 모호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타이유는 금기를 깨뜨리는 “금지된 것의 탐닉” 속에서 인간이 일종의 ‘한계 경험(limit-experience)’을 맞이한다고 봤습니다. 금기를 어길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해방감, 죄책감과 쾌감이 교차하는 그 순간, 우리는 평소의 자아를 넘어서 새로운 진실과 부딪히게 된다는 거죠. 이건 아브젝트를 마주치는 순간과도 비슷합니다.


또 바타이유는 ‘에로티즘(Eroticism)’에 관해 쓰면서, 성적 쾌락과 죽음 충동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분석했어요. 삶을 창조하는 성행위와 삶을 파괴하는 죽음은 완전 반대처럼 보이지만, 아주 강렬한 관능적 쾌락은 잠깐이나마 자아의 죽음(또는 융해)을 동반합니다. 사회는 이런 걸 무서워해서 성을 억압·규제했지만, 동시에 인간은 성을 통해 금지된 영역을 살짝 엿보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죠. 바타이유가 높이 평가한 것도 바로 이런 ‘탐험 정신’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성스럽고 고귀한 것보다, 추하고 천한 곳에 오히려 인간의 진정한 숨결이 있다고까지 말해요. 우리의 하얀 도화지 같은 이성은 사실 온갖 얼룩과 오점 위에 떠 있는 막 같은 것이고, 그 아래에는 늘 혼돈의 진흙탕이 꿈틀거린다는 깨달음이죠.


바타이유의 이런 시선은 아브젝트의 철학적 의미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크리스테바가 아브젝트를 개인의 심리적 경험으로 풀어냈다면, 바타이유는 그걸 좀 더 존재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서 생각해본 셈이랄까요. 고상함과 저속함이 섞여 있고, 순수함과 타락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오히려 인간 조건의 진짜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역설을 던져줍니다. 더러운 게 때론 성스럽고, 성스러운 게 때론 잔인하기도 하다는 사실 말이죠. 이런 역설을 똑바로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 삶의 전체 스펙트럼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젝트는 그 스펙트럼의 어두운 끝자락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죠. 바타이유의 관점으로 보면, 그 어둠은 단지 두렵기만 한 게 아니라 묘한 매력을 품은 심연으로 다가옵니다.


권력과 배제 – 푸코의 시선으로 본 아브젝트


아브젝트를 이해하는 또 다른 시선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권력-지식(power-knowledge) 개념하고도 이어집니다. 푸코는 지식하고 권력이 사실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복합체라고 주장했어요. 즉, 사회가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규범을 만들어놓고, 그 규범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권력을 사용해서 배제해 왔다는 겁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과학·의학·인간학 같은 분야가 발달하고, 그 결과 ‘합리성’과 ‘정상성’ 같은 개념이 생겨났죠. 그런데 누가 ‘정상’이고 ‘이성적’인지 정하려면, 그 반대편에 ‘비정상’이고 ‘비이성’인 존재도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라는 근대의 상식 뒤에는, 정신병자나 광인(狂人)을 사회에서 떼어놓고, 미치지 않은 사람들만이 ‘진짜 인간’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과정이 숨어 있었던 거예요.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던 바보나 광대, 미치광이들이 근대 들어서는 정신병원이나 수용소로 쫓겨났죠. 푸코는 이걸 “광기의 역사”라 부르면서, 이성이 광기를 추방하면서 자기 왕국을 세워 온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권력의 배제 방식은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죄수는 교도소 담장 안에 가둬지거나, 나병환자는 공동체 밖에 별도의 나병촌으로 쫓겨났던 일이 떠오르죠. 성적 규범에 어긋나는 동성애자나 성소수자 역시 오랫동안 병자나 변태로 취급받으며 정상 사회에서 밀려나곤 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런 배제들을 푸코의 통찰로 보면, 사실은 권력이 지식을 가장해 만든 ‘낙인’이었다는 거예요. 지식-권력 복합체는 규범에 들지 않는 이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낙인을 찍어 통제하거나 격리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회가 스스로를 “정상적이고 깨끗한 공동체”라고 주장하기 위해, 반대로 “비정상적이고 더러운 존재”를 일부러 만들어서 밖으로 밀어낸 셈이죠. 이렇게 사회적 배제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과정이야말로, 큰 규모에서 벌어지는 아브젝트(비체) 생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젝트가 사회적인 얼굴로 드러나는 경우는 무척 다양합니다. 때론 혐오스러운 범죄자의 모습일 수도 있고, 부랑자나 창녀, 마약중독자 같은 주변인의 모습이 될 수도 있죠. 정신질환자나 장애인처럼 낯설고 불쾌하다고 여겨지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부류는 사회 다수에게 “이상하고 더러운 존재”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겉으론 동정하는 척하더라도, 그 뒤에는 언제나 공포와 불결함의 낙인이 찍혀 있죠. 중세 유럽에서 나병환자들이 살아 있는 시체 취급을 받으며 도시 밖으로 내쫓겼던 걸 푸코는 근대 정신병자 격리의 전조로 봤습니다. 현대 사회라고 크게 다를 건 없어요. 겉으론 인간성이나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뒤에서는 여전히 사회의 ‘아브젝트들’을 만들어내고 쫓아내고 있습니다. 발전한 도시의 화려한 풍경 뒤에는 노숙자나 난민, 빈곤층이 쓰레기 취급받으며 밀려나 있고, 인터넷에서도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이 판치고. 결국 “정상”을 지키기 위해 “비정상”을 만들어내는 권력의 작동은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아브젝트라는 개념은 이런 사회 현상들을 분석할 때도 쓰입니다. 혐오범죄, 여성혐오(misogyny)나 동성애 혐오, 더 나아가 인종청소나 집단학살까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인간 범주 바깥으로 밀어내는 과정이 존재합니다.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정신적 구토반응” 같은 게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거죠. 사회가 자기가 불쾌해하는 타자를 구토하듯 내보낸다는 겁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일 거예요. 나치는 유대인을 ‘비체’로 만들기 위해 악랄한 선전 작업을 벌였습니다. 유대인을 쥐·해충·기생충 따위에 비유하면서, 병균이나 악의 화신처럼 그려낸 거죠. 1940년에 나온 나치 선전영화 <영원한 유대인>은 유대인을 질병 옮기는 쥐떼로까지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비인간화된 유대인에 대해 사람들은 그들을 살해하는 걸, 마치 쓰레기나 오물을 치우는 일로 받아들이게 됐고, 그 결과가 역사상 최악의 학살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회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정제된 폭력’, 다시 말해 배제와 낙인의 ‘부드러운 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죠. 예를 들어 난민이나 이주민을 두고 “바이러스를 몰고 온다”거나 “우리 문명을 해칠 야만인”이라며 터부시하는 반응이 그렇습니다. 그들을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 즉 ‘사회적 비체’로 보는 인식이 깔려 있는 거예요. 젠더 문제를 돌아봐도,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타자, 혹은 통제 대상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옛날엔 여성의 월경이 ‘부정하다’며 종교 의식에서 배제된 경우도 많았고, 산후 여성들은 격리되기도 했죠.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히스테리’라는 병으로 몰아버리기도 했고요. 여성이 출산과 피로 상징되는 육체성 때문에 경외와 혐오가 동시에 뒤섞인 시선을 받았으며, 여성의 정신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열등시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여성을 집단적으로 타자화한 역사가 곧 여성을 ‘아브젝트’에 가까운 위치로 밀어낸 예인 셈입니다.


결국 푸코의 관점을 따르면, 아브젝트는 권력이 그어놓은 경계선 밖에 놓인 이들이나 범주를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이들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겉모습 이면에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권력의 의지가 숨어 있죠. 다수 집단은 소수의 타자를 혐오스럽고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음으로써, 자신들은 깨끗하고 옳은 편에 서 있다고 안심합니다. 이런 권력-지식의 교묘한 작동은 우리가 사는 현실 전반에 퍼져 있어요. 크리스테바 이론이 개인 심리의 미시적 차원에서 아브젝트를 설명했다면, 푸코의 통찰은 그 아브젝트가 사회적으로, 거시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회라는 큰 거울에 비친 아브젝트는 결국 집단적 공포와 혐오의 구조이자, 동시에 권력이 감추고 싶어 하는 추한 단면이기도 하죠. 우리가 아브젝트 개념으로 이런 구조를 직시할 때, 비로소 배제와 혐오의 메커니즘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좀 더 포용적인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열린다고 봅니다.


금기의 향연 – 공포 영화와 문학 속 아브젝트


*언급된 창작물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브젝트라는 개념은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공포 서사를 해석할 때도 자주 활용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겪기 어려운 극단적인 아브젝트 상황을, 문학이나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호러 장르는 아브젝트가 온갖 형태로 펼쳐지는 대표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이 발표된 이후, 많은 평론가들이 호러 영화와 문학 속 장면들을 아브젝트 개념으로 분석해 왔습니다. 이제 몇 가지 대표 사례를 통해, 문화 속에서 아브젝트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엑소시스트>(1973)


윌리엄 프리드킨이 연출한 이 고전 오컬트 호러 영화는, 아브젝트 이미지를 백과사전처럼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영화에서 12살 소녀 리건은 악마에 씌인 뒤 점차 인간성을 잃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얼굴에 상처와 종기가 솟고, 피부색이 기괴하게 변하며, 목소리조차 굵고 괴상한 악마의 음성으로 바뀝니다. 어느 날 리건은 파티 손님들 앞에서 갑자기 오줌을 지리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는 무의식적인 배설 행위를 통해 아브젝트가 처음으로 표면화되는 순간입니다. 이어서 녹색 구토물을 사방으로 뿜어대고, 침대를 흔들며 욕설과 신성모독을 내뱉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관객에게 극도의 혐오와 공포를 안겨 주었고, 실제 극장 상영 당시 일부 관객이 구토하거나 기절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 영화가 큰 충격을 준 이유는, 몸과 정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아브젝트의 극한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테바가 강조했듯이, 아브젝트는 주로 ‘신체’, 특히 ‘여성 신체’와 결부됩니다. 깨끗해야 할 몸의 구멍(입, 성기)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더러운 것들이 분출될 때, 인간은 극심한 불쾌와 공포를 느낍니다. <엑소시스트>에서 리건이 끊임없이 뿜어내는 구토물은 전형적인 아브젝트 이미지를 선사합니다. 특히 사제의 얼굴로 구토를 뿜어내는 장면은, “몸이 오염되고 훼손되는 순간”을 극도로 과장하여 관객의 금기 의식을 자극합니다. 더불어 이 작품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성장과 신체 변화에 대한 문화적 불안도 함께 담아냈습니다.


호러 영화 속에서 사춘기 여성의 몸이 악마화되는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의 생리와 성을 이질적이고 두려운 것, 즉 아브젝트로 바라보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리건이 피투성이 생리를 하거나 임신하는 장면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침대 위에서의 경련과 유체 배출은 “여성적 육체가 일으키는 혼돈”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종교적 대결 구도로 표현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사제)가 타락한 딸(소녀)을 정화하려는 서사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결국 <엑소시스트>는 몸과 영혼의 경계가 붕괴되는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걸작으로, 아브젝트 개념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겟 아웃>(2017)


현대 공포영화 중에서는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 작품은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신체 공포와 정체성 침해를 통해 아브젝트적 불안을 일으키는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흑인 청년 크리스는 백인 가족의 초대로 시골 마을에 가게 되지만, 이 가족이 흑인들의 육체를 노려 뇌 이식 수술로 몸을 빼앗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겟 아웃>은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은유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후반부에는 전형적인 바디 호러로 전개됩니다. 크리스는 마취 상태로 수술대에 묶이고, 자신의 몸이 타인의 의식이 들어갈 ‘그릇’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설정은 자아와 육체가 분리되는 아브젝트적 공포의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이지만 내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상황, 다시 말해 주체였던 내가 객체로 전락하는 악몽을 보여줍니다. 이는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극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백인들은 흑인의 육체적 장점(힘과 젊음 등)은 탐내면서, 영혼과 정체성은 무시하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크리스가 최면 상태로 빠져 ‘침잠의 방(Sunken Place)’이라는 무의식의 심연에 빠지는 장면은, 자기 몸으로부터 추방당한 영혼의 고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현실 세계의 소리와 장면을 멀리서 희미하게 볼 뿐,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의 공포는 귀신이나 무기 같은 뻔한 소재와 달리, 철저한 무력감과 소외감이라는 심리적 아브젝트를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겟 아웃>의 공포는 인종적 타자화라는 사회적 아브젝트가 신체 강탈이라는 바디 호러 요소와 결합해 빚어낸 독특한 사례입니다.


이 영화는 “만약 몸과 정체성이 갈라져 남의 것이 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상황입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인간의 주체성이 얼마나 쉽게 대상화될 수 있는지 깨닫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결국 <겟 아웃>은 현대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 혐오와 객체화의 공포를 아브젝트적 신체 공포로 구현한 사회파 공포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1915)


문학에서도 아브젝트라는 테마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엄청나게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다는 설정은 인간 정체성의 붕괴를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보고 혼비백산하며 문을 잠그고 숨거나, 비명을 지릅니다. 한때 집안의 아들이자 오빠였던 그가 이제는 끔찍하고 위험한 해충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그레고르는 가족이 지닌 상징질서에서 추방된 존재, 즉 아브젝트가 됩니다. 그의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말로 들리지 않고, 방 안은 벌레 냄새로 가득하며, 가족들은 그를 “집 안에서 치워 버려야 할 것”처럼 여깁니다. 카프카는 이 처참한 설정을 통해 소외와 자기 부정이라는 감정을 풍자적으로 그려내지만, 동시에 정신분석적인 공포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내가 벌레로 변해 기어다닌다면?”이라는 상상은 자아의 붕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가족들은 돌볼 여력조차 잃고, 그레고르 벌레는 방 구석에서 쓸쓸히 죽습니다. 하녀는 시체 치우듯 유해를 처리하고, 가족들은 오히려 안도하며 새로운 미래를 꿈꿉니다.


이 결말은 처절하면서도 섬뜩합니다. 그레고르의 존재는 한때 가족에게 필요했지만, 결국 쓰레기처럼 버려진 잔해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변신>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와 자기 가치의 부정을 아브젝트 메타포로 표현한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작품을 읽고 나면 부조리한 웃음과 함께 씁쓸한 공포가 뒤따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고딕 문학 전통 속에서도 인간과 괴물의 경계가 무너지는 변신 모티프는 흔히 등장합니다. 늑대인간, 지킬 박사와 하이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이야기 역시 인간 내부의 ‘타자’가 출현하는 아브젝트적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서구 고딕 문학


더 고전적인 예로, 18~19세기에 꽃핀 서구 고딕 문학에는 죽음과 광기의 미학이 가득합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시체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인조 인간이 등장하는데, 이 괴물은 태어났을 때 순진무구한 상태였으나, 사회로부터 혐오와 배척을 받으며 결국 “악마”로 변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은 살아 있되 죽은 자들의 신체를 결합해 탄생한 존재로, 인간 신체의 통합성과 탄생의 순수성 개념을 근본부터 흔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브젝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일부가 합쳐져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진 셈입니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나오는 흡혈귀 또한 마찬가지 사례입니다. 드라큘라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로, 피를 빨아먹어야만 생명을 이어가는 혐오스러운 행위를 합니다. 피해자들은 물려서 피를 빼앗길 때 일종의 쾌락과 공포가 섞인 무력감을 경험하는데, 이는 아브젝트의 체험과 흡사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에도 인체 훼손, 미이라, 산 채로 매장 등 기괴한 소재들이 등장하며, 이는 전통적인 금기와 혐오를 정면에 내세워 독자에게 오싹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당대 독자들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이야기에 열광했고, 현재까지도 호러 장르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젝트가 주는 양가적 매혹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문명화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죽음과 파괴, 금기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이중적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고딕 문학의 성공은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게 건드렸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정리하자면, 영화와 문학에 등장하는 아브젝트적 장면들은 단순한 끔찍함을 넘어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공포를 건드립니다. 공포 작품 속 주인공들이 겪는 상황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공포의 본질은 사실 우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구토, 변신, 피, 시신 같은 소재가 나오면 독자나 관객은 즉각적으로 몸서리를 치게 되는데, 이 반응 자체가 크리스테바가 말한 아브젝트 체험에 해당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금기를 어지럽히는 장면을 예술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안전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섭고 혐오스러우면서도 끝까지 보거나 읽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모순적 쾌감을 드러냅니다. 통제된 환경에서 아브젝트를 마주함으로써 내면의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고, 그 이후에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호러 영화를 보고 “으악!” 비명을 질렀다가도 “그래도 재미있다”고 말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금기를 침범하는 체험이야말로 때로 강렬한 해방과 쾌감을 제공하기 마련입니다.


몸으로 그리는 진실 – 현대 예술과 아브젝트


아브젝트 영역을 가장 적나라하게 탐색한 분야 중 하나는 현대 미술입니다. 특히 20세기 후반 퍼포먼스 아트와 설치 미술에서 인체의 경계와 금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술가들은 피, 땀, 눈물, 오물 같은 실제 물질을 재료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육체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행위를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체험을 선사했습니다. 미술사에서는 이를 “아브젝트 아트(Abject Art)”라고 부르며, 예술가들이 불쾌하고 충격적인 소재를 굳이 선택하는 이유는 아브젝트를 통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입니다.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로 끔찍한 광경을 작품으로 펼쳐 놓음으로써, 관객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직접 마주하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입니다. 세르비아 태생의 그녀는 ‘퍼포먼스 아트의 거장’으로 불리며, 인간의 신체와 한계를 주제로 한 급진적 작품들로 유명합니다. 그중에서도 1974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리듬 0 (Rhythm 0)>은 아브젝트 예술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모비치는 6시간 동안 갤러리 공간에 멍하니 서 있는 ‘오브제’가 되었습니다. 그녀 옆 탁자 위에는 장미, 깃털, 꿀, 포도처럼 비교적 즐거운 물건부터 칼, 가위, 채찍, 총알, 총같이 위험한 물건까지 총 72가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관객에게 “이 물건들을 사용해 무엇이든 내게 해도 좋다”는 충격적인 참여 지침을 제공했습니다.

처음에는 관객들이 꽃을 건네주거나 포도를 먹여 주는 순한 장난을 쳤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행동은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누군가는 가위로 그녀의 옷을 잘라 발가벗겼고, 칼로 가슴을 살짝 그어 피를 보이게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 흐르는 피를 입으로 받아 마셨으며, 다른 누군가는 권총에 실탄을 장전해 그녀 손에 쥐여 주고, 손가락을 움직여 자기 목에 총구를 겨누도록 유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극단으로 치닫기 직전, 퍼포먼스가 종료되었을 때 아브라모비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퍼포먼스가 끝난 직후, 그녀에게 가학적인 행위를 하던 이들은 모두 도망치듯 전시장을 빠져나갔다고 전해집니다.


<리듬 0>은 인간 내면에 숨은 폭력성과 아브젝트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깊은 의미를 남겼습니다. 평범한 관객이라도 책임이 면제되고 상황이 허락되면 순식간에 “괴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아무런 저항 없이 객체가 되어 버린 여성의 나체는 사회 속 여성의 위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녀가 받은 폭력과 모욕은 곧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착취를 은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퍼포먼스는 관객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당신도 이렇게 잔혹해질 수 있다.” 혹은 “당신도 저 무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관객은 자신 안의 가해자 가능성과 피해자 가능성을 동시에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대면은 전형적으로 아브젝트적인 경험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격렬한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깨닫고 전율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예술을 통한 아브젝트 체험이 주는 강력한 충격요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모비치의 다른 퍼포먼스들도 아브젝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발칸 바로크>(Balkan Baroque, 1997)에서 그녀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 지하실에 피 묻은 소뼈 1500개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하루 6시간씩 4일간 뼈를 솔로 씻었습니다. 썩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그녀는 세르비아 전통 민요를 부르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 작품은 1990년대 자국(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내전과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습니다. 산처럼 쌓인 뼈 무더기는 집단 학살로 쌓인 시체 더미를 떠올리게 했고, 아무리 씻어도 피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물은 점점 검게 변했습니다. 죽음을 미화하기보다 추악하고 비통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성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미술의 아브젝트 작업들은 사회적 고발이나 치유 의식(제의)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폭력의 결과물을 작품 형태로 마주하게 함으로써, 기억하고 성찰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993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Abject Art> 전시가 이러한 경향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여기에는 키키 스미스(Kiki Smith)의 작품, 즉 사족보행하는 여성 조각상에 길게 이어지는 탯줄 같은 오물이 흘러나오는 조각이나, 로버트 고버(Robert Gober)의 잘려나온 인간 다리 조각 설치물이 포함되었습니다.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구토 초상 사진도 전시되었는데, 이는 토사물로 가득 찬 악취 나는 세트장에서 자기 신체 일부만을 사진으로 담은 것이었습니다. 모두 인간 신체를 파편화하거나 분비물로 형상화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문제 삼고 있었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본 관객들 중에는 혐오감을 표출하며 분노하거나, 일부 평론가는 “너무 역겹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미술과 퀴어 아트 진영에서 이러한 아브젝트 예술이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성의 생리와 출산, 남녀 신체 차이, 에이즈 환자의 고통처럼 사회가 가려 왔던 신체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정치적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젝트는 추하고 불편한 소재 또한 예술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예술의 역할을 확장하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수성을 요구했습니다.


현대 예술 속 아브젝트는 인간 조건에 대한 독특한 진실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몸은 동시에 깨끗함과 더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의 실재를 애써 잊고 살아가지만, 예술은 이를 다시 눈앞에 들이미는 것입니다. 어떤 작품들은 너무 적나라해서 보는 이에게 역겨움과 충격을 안기지만, 한편으로 그 여파로 깊은 성찰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아브젝트 예술은 “왜 이 장면이 보기 싫은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불쾌함의 이유를 곱씹다 보면, 관객은 자신이 세워 놓은 정신적 경계를 인식하고, 그 경계 밖의 타자나 자신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예술이야말로 이러한 불편한 진실과 만나게 해 주는 매개체입니다. 아브젝트를 탐구해 온 예술가들은 “눈을 돌리지 말고 직시하라. 그 혐오 너머에 진실이 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그려 내고자 한 진실은, 인간 존재가 지닌 연약함과 강인함, 혐오스러움과 숭고함이 겹겹이 뒤섞인 복합체였을 것입니다.


역사의 어두운 거울 – 현실 속 아브젝트의 흔적


아브젝트의 개념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도 선명한 흔적을 남깁니다. 앞서 권력과 배제의 맥락에서 이야기했듯이, 인류 역사에서는 특정 집단이나 상황을 아브젝트화하여 두려움에 대처해 온 사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역사는 때로 공포에 질린 사회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데, 이는 곧 우리 내면의 어두운 진실을 비춰 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번에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실 속 아브젝트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염병의 공포와 희생양


대규모 전염병의 발생은 사회 전체를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는 사건입니다. 이때 질병 자체가 아브젝트가 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균이 몸을 침범해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공포심 때문에, 환자를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는 시선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중세 유럽 흑사병 시절, 병자들은 썩은 고기처럼 취급받았고,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퍼져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죽음의 공포가 지배할 때, 이성이 아니라 집단적 아브젝트 반응으로 대응했던 사례입니다.


좀 더 가까운 예로는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출혈열이 유행했을 때, 전 세계가 에볼라 환자를 바이러스 덩어리처럼 여기며 기피했습니다. 서구 언론은 아프리카의 전통 장례 문화(시신 접촉 등)를 야만적인 행위처럼 보도했고, 에볼라 생존자들은 낙인이 찍혀 지역사회에서 배척당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지목된 특정 지역이나 인종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나 기침을 하는 사람은 곧 ‘움직이는 아브젝트’처럼 간주되어 피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모두 공포에 대응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반응, 즉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염된 몸은 더 이상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염된 대상으로 격리됩니다. 방역이라는 명분이 있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낙인과 혐오는 종종 비합리적이고 가혹합니다. 아브젝트는 이렇게 사회적 공황 상태에서 한층 기승을 부리곤 합니다.


혐오와 학살


앞서 언급한 홀로코스트는 아브젝트의 관점으로 볼 때 가장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민족 공동체의 이물질로 규정하기 위해 체계적인 비인간화 선전을 진행했습니다. 유대인을 쥐, 바퀴벌레, 이 같은 해충에 비유하며 “해충 박멸”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들은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대중에게 깊이 각인되어, 실제 가스실 학살이 이루어질 때 가해자들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더러운 것을 청소한다’고 여길 정도로 자기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해됐음에도, 가해자들은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도록 세뇌되었습니다.


이는 아브젝트가 지닌 비인간화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나치가 싫어했던 집단, 예를 들어 집시·장애인·동성애자 등도 ‘암세포’처럼 여겨져 제거 대상이 되었습니다. 1994년 르완다 학살 당시에도 극단주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Inyenzi)”로 부르며 학살을 선동했습니다. 이렇게 언어와 이미지를 동원해 특정 집단을 완전히 타자화함으로써, 가해자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 집단학살 사례를 들여다보면, 아브젝트화를 위한 언어 전략이 늘 존재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는 우리가 계속 경계해야 할 부분이며, 아브젝트 개념은 그러한 증오의 메커니즘을 파헤쳐 반복되는 비극을 막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민과 이민자


21세기에도 타자에 대한 혐오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난민 문제는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그들을 “우리 사회를 해치는 이물질”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입니다. “난민이 범죄를 일으킨다”거나 “난민이 질병을 옮긴다” 같은 주장은 아브젝트적 상상에서 비롯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당시, 일부 언론은 중동 난민 유입을 “쓰나미”, “메뚜기 떼”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난민을 인간 집단이 아닌 재해나 해충에 빗댄 것으로, 결국 국경을 닫고 이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난민들은 비좁은 수용소나 국경 지대에 방치된 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회의 경계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은 ‘아브젝트’가 되어 버립니다.


이민자나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 또한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합니다. 낯선 언어, 다른 피부색, 이질적인 문화 풍습을 지닌 사람들을 ‘우리’와 섞일 수 없는 타자로 설정하고 경멸하거나 배척하는 모습입니다. 서구 국가에서 최근 부각된 이슬람 혐오증 역시, 무슬림을 폭력적 광신도로 묘사하며 다수의 두려움과 혐오를 자극했습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 곳곳에 나타나는 갈등 중 상당수는 상대를 아브젝트화하는 상상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대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먼저 타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아브젝트 시선이 작동하면 그게 힘들어집니다. 아브젝트 개념이 주는 경고는 명료합니다. “당신이 혐오하는 그것은 사실 당신 자신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 난민과 이민자를 배척하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저버릴 위험에 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젠더와 여성의 위치


역사적으로 여성은 오랜 기간 아브젝트적 타자로 취급받아 온 면이 있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성모 마리아처럼 이상화되기도 했으나, 동시에 이브나 릴리트 같은 존재로 악마화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성의 신체적 주기와 성적 주체성은 남성 중심 문화에서 불안과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고대 종교에서는 월경 중인 여성을 부정한 존재라 여겨 격리했고, 산후 여성도 일정 기간 정결 의식을 치르기 전까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을 아브젝트로 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또한 여성에 대한 아브젝트화 폭력이었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여성들은 기성 질서에 순응하지 않거나, 남성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약초술 등)을 지녔다는 이유로 악마와 결탁한 존재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19세기 이후 의학에서도 여성은 열등한 남성으로 종종 간주되었고, 자율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은 “히스테리 환자”처럼 진단받았습니다. 20세기 초까지도 성욕이 있는 여성을 난소 절제 수술로 ‘치료’하려는 비극적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여성의 몸과 욕망을 통제해야 할 비정상으로 본 사회적 시선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여성=자연=혼돈이라는 등식 속에서, 여성은 계속해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잠재적 아브젝트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현대 페미니즘의 발전으로 많은 부분이 변화했지만, 여성에 대한 아브젝트적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월경이나 출산에 대해 대놓고 말하기를 터부시하거나, 광고에서조차 생리혈을 파란 액체로 표현하는 식의 ‘표백’ 현상이 여전합니다. 동시에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여성 신체를 객체화하고 소비하는 또 다른 극단도 존재합니다. 이런 모순은 여전히 여성의 몸이 온전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함을 보여 주며, 호러 영화 등 대중문화 속에서도 사춘기나 임신 같은 여성의 생리적 변화가 공포 이미지로 소비되는 예를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의 괴물 출산 장면은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혐오적으로 묘사하는 사례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는 대중문화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여성에 대한 아브젝트적 인식을 잘 보여 줍니다.


이처럼 어떤 이들은 역사와 사회에서 아브젝트가 되었고, 특정한 순간은 아브젝트의 공포로 기억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아브젝트화가 언제나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상이지만, 그들은 이상하고 더럽다.”라는 심리가 작동할 때 인권 유린과 폭력이 싹트기 마련입니다. 반면, 아브젝트 개념은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오늘날 다수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라도, 사회적 변화 속에서 언제든지 아브젝트가 된 ‘그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 구조는 언제나 변하며,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아브젝트의 역사를 성찰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겸손함을 배우는 일과도 같습니다.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 또는 불쾌하게 느껴지는 무엇인가를 함부로 배제하기 전에, 왜 그것이 낯설고 두려운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자각하고, 그 너머에 있는 타자와 연대할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의 어두운 거울에 비친 아브젝트의 얼굴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공포의 권력을 넘어


아브젝트라는 개념을 따라 심리의 내부에서 사회, 문화, 역사까지 긴 여정을 해보았습니다. 이 낯설고도 불쾌한 개념은 우리 삶 곳곳에 자리 잡은 공포와 금기의 구조를 해명해 주는 열쇠이자,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를 비춰 주는 거울이었습니다. 크리스테바가 “각각의 초자아에는 그것의 비체가 있다”고 말했듯이, 어느 사회든 어느 개인이든 밀어내고 싶은 어두운 부분을 품고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억압함으로써 스스로를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려 하지만, 완전히 몰아냈다고 여긴 뒤에도 아브젝트는 언제나 돌아옵니다. 억압된 것은 형태를 바꿔 되돌아온다는 심리의 원리에 따라, 아브젝트는 때로 악몽으로, 때로 현실의 분쟁과 사고로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포의 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젝트를 이해하는 지식은 그것을 극복할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혐오와 배제의 감정이 엄습할 때 “내가 지금 느끼는 이것이 바로 아브젝트에 대한 반응이구나” 하고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한 발짝 떨어져 이를 바라보게 됩니다. 공포는 이름 붙이지 못할 때 가장 강력하지만, 이름을 붙이고 서사화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 길들여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테바가 아브젝트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분석한 이유도, 말로 하기 어려운 금기를 언어의 장으로 이끌어 옴으로써 그 막연한 힘을 해체하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아브젝트는 여전히 불가해한 측면을 남깁니다. 우리가 완전히 해소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마주할 용기를 낼 때,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장할 가능성을 얻습니다. 예술가들은 자기 육체를 내보이며 그 과정을 직접 시연해 보였고, 철학자들은 개념과 글을 통해 그 심연을 응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제 그 다음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혐오스럽다고 피했던 것, 두려워 외면했던 것을 조금씩 직시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기 이해가 깊어지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꿰뚫어 볼 때 연민과 공존의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글 자체도 아브젝트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종의 지적 모험이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아마 몇 번이고 얼굴을 찡그리며 텍스트를 읽어나갔을 것입니다. 그 불편함에도 끝까지 함께해 주셨다면, 어느새 아브젝트와 조금 더 친숙해지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아브젝트는 막연하게 혐오스러운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일부로 이해되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공포와 매혹이 뒤섞인 그 경계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한결 그 영향력이 줄어든 듯하지 않습니까. 크리스테바가 말했듯, 공포의 권력은 인정하고 응시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 내면과 사회에 도사린 아브젝트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그 공포의 권력을 넘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거울을 마주 들고, 그 안에 비친 낯선 얼굴을 맞닥뜨릴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얼굴은 흉측하거나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우리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공포는 새로운 의미로 바뀔 것입니다. 경계 밖에 있는 낯선 대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아브젝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화두가 아닐까요. 이제 두려움을 딛고 경계 너머로 한 걸음 내디딜 준비가 되었습니까? 우리 안의 낯선 것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야말로, 공포를 넘어 온전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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