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의 도약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

by 새솔

*해당 브런치북은 '친근한 인문학'을 지향하고 있어, 제 다른 글들보다 편안한 문체로 작성되었습니다.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저서 <공포와 전율>(1843)은 구약성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신앙의 기사’ 개념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기사란, 말 그대로 믿음의 용사를 뜻하는데,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지요. 이 명령은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그 명령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키르케고르는 이를 통해 신앙(믿음)이란 무엇인지 조명하고자 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책에서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기사”, 즉 신앙의 기사라고 칭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윤리나 상식의 기준으로 보면 살인을 저지르려 한 비윤리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직 하나님과 1:1로 맺은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믿음의 행위를 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자에 대한 신뢰 하나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키르케고르가 강조한 믿음의 역설, 즉 “불합리한 것을 끝까지 믿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믿음의 도약”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어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 자체가 이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 불합리성을 껴안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렇듯 신앙의 기사란, 상식을 초월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키르케고르는 이를 통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기사 개념을 이해하려면 키르케고르가 말한 “이중 운동” 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의 기사가 되기 위해 두 단계의 내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무한한 체념”의 단계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내려놓는 결단으로, 아브라함의 경우 아들 이삭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뜻하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이삭에 대한 부성애와 약속의 성취에 대한 희망을 일단 포기했습니다. 이러한 체념을 이룬 사람을 키르케고르는 “무한히 체념한 기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단지 절망적인 체념에 머물 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가 중요한데, 그것이 바로 신앙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돌려주실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습니다. 즉,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이삭을 다시 얻으리라는 기대와 신뢰를 갖는 것이죠.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두 가지 내적 움직임(포기의 결단과 기적을 바라는 믿음)이 모두 충족될 때 비로소 신앙의 기사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들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이 결국 이삭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스스로는 포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돌려주실 것이라 믿는 역설적인 태도가 신앙의 기사의 핵심입니다.


현대적인 예시로 풀어보기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설명이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이를 현대적이거나 친숙한 예를 통해 풀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앞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고대의 종교적 서사라 현대인의 삶과 동떨어진 듯 보일 수 있지만, 그 핵심정신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한 가지 예로, 간절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사람이 이루기 힘든 꿈이나 목표를 향해 모든 걸 바쳐 노력한다고 해보죠. 주위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라며 “이젠 그만 포기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편으로 자신의 꿈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간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다고 믿으며 묵묵히 나아가는 셈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일상 속의 작은 ‘신앙의 기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명의 예술가가 오랜 기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결국 큰 공감을 얻는 경우, 그는 스스로는 모든 걸 내려놓을 각오를 했지만 결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은 점에서 신앙의 기사와 닮아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문학 작품이나 영화 속 인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해리를 예로 들어보죠. 해리는 자신이 볼드모트를 물리칠 열쇠임을 알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러 나섭니다. 이때 해리는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어딘가에서 구원이 있으리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해리는 자신을 내어놓는 순간 뜻밖의 방식으로 살아 돌아와 결국 악을 무찌르게 되지요. 이러한 서사는 희생과 구원의 역설적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 개념을 연상시킵니다. 해리는 물론 종교적인 믿음에 따른 행동은 아니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체념)와 결국엔 모두가 구원받을 거라는 믿음(희망)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신앙의 기사적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이라는 당시로서는 요원해 보이는 꿈을 믿으며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희생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인물들은 현실적 확률로만 따지면 성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조선의 독립”이라는 그녀의 믿음은 훗날 현실이 되었지요. 물론 이들의 믿음은 종교적 신앙이라기보다 정의와 자유에 대한 신념이었지만, 자신을 던져 불가능을 믿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세속적인 “신앙의 기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적 사례를 통해 본 신앙의 기사의 개념은, 꼭 종교적 맥락을 넘어 어떤 가치나 목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태도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기사' 개념에 영향을 준 요소들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 개념은 그가 살던 시대의 철학적·신학적 흐름에 대한 비판과 응답으로 나온 것입니다. 특히 당대에 유행하던 헤겔 철학과의 대립 속에서 이 개념의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보편적 윤리와 사회적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헤겔에게 윤리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법칙이며, 개인은 자신의 주관적 도덕(Moralität)을 공동체의 윤리적 질서(Sittlichkeit)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에 비추어 보면, 아브라함이 한 행위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보편 윤리에 철저히 위배되며,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헤겔 철학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잘못된 일탈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맥락에서 “헤겔의 논리대로라면 아브라함은 살인자일 뿐”이라는 지적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과 결별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어, 보편적 윤리조차 뛰어넘는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영역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윤리의 목적론적 정지”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간단히 말해 더 높은 목적(신앙)을 위해 일시적으로 윤리 규범을 중지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도덕률보다도 우위에 있는 절대자이며,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궁극적 목적(telos) 앞에서 일반 윤리는 잠시 보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개인이 신과 직접 대면하는 절대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관계에 있었기에 “윤리의 보편성”을 넘어서 개인적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헤겔식 사고로는 이해 불가능한 역설이지만, 키르케고르는 그 역설 속에 참된 신앙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본 것이지요.


키르케고르의 신학적 배경도 이 개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루터파 전통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았지만, 당대 덴마크 국교회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모두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으나, 키르케고르는 그 속에서 진정한 개인적 신앙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여기는 풍조에 대해 그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매개 없이 직면하는 신앙만이 진짜라고 본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중심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교리나 사회 윤리를 잘 지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 주고받는 절대적 신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대 기독교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훗날 실존주의 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컨대, 실존주의 철학은 개인의 주체적 결단과 개인 대 개인(신)의 만남을 중시하는데, 그 뿌리에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후의 신학자들은 키르케고르가 강조한 신앙의 내면적 결단을 재조명하면서, 형식적 종교 생활을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역사적 변화도 이 개념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은 근대 사회가 무르익으며 이성주의, 합리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습니다.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전통적 신앙은 점차 개인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나고, 종교적 신념보다는 합리적 계산과 도덕 철학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신앙의 역설적이고 비합리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보여줌으로써, 인간 존재의 진정성에 대해 발언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열렬한 개인적 신앙을 아브라함의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일깨우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확신하는 어떤 진리를 위해 결단하고 뛰어드는 용기, 바로 그것이 근대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에도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오늘날까지도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각성제”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질적인 물음—내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신앙의 기사의 의미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증명되고 설명되어야만 믿으려 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이런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고 행동하는 사람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비합리적인 광신자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 진정한 믿음이 있는가? 모든 것이 계산되고 이해 가능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궁극적인 가치나 의미를 붙들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없다면, 우리의 삶은 편안하고 안전할지는 몰라도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은 부족할지 모릅니다.


신앙의 기사는 단순히 종교적 열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 전체를 던질 만큼 소중히 여기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동시에 이루어질 것을 끝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태도는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변화나 커다란 진보는 종종 이런 비합리적인 믿음에서 비롯되곤 했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던 것을 끝내 이뤄낸 과학자,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면에서 신앙의 기사적 요소가 숨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에 “언젠가 평등과 형제애의 꿈이 실현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당시에는 요원한 꿈처럼 보였지만, 결국 현실로 한 걸음씩 다가왔지요. 그의 연설 제목처럼 “I Have a Dream”이라는 말은, 현실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꿈을 믿음으로 확신하는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폭력에 맞서 평화적으로 싸울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도 신앙의 기사는 종교의 영역을 넘어 깊은 신념을 지닌 채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들로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을 보며 경외감을 표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기사는 증인이 될 뿐 가르치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진정한 믿음은 말로 설명되기보다는 삶으로 증명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조용히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지만, 그 내면에는 확고한 신앙 또는 신념이 자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행복과 평온을 누리는 사람들이지요.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 개념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다시금 주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그토록 믿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신앙의 기사는 결코 현실도피적인 광신자가 아니라, 차갑고 계산적인 현실을 살아내면서도 가슴 뜨거운 믿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한 평범한 사람이 점심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저 사람이 바로 신앙의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마음속에 절대적인 믿음을 품고 사는 이가 진정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서 작은 신앙의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끝까지 지키고, 때로는 손해를 보고 오해를 받아도 궁극의 선(善)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키르케고르가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의 기사 정신이 아닐까요?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기사는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만들 용기와 희망에 대한 하나의 초대장처럼 느껴집니다. 어려운 철학 개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빛을 발하는 인간 정신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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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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