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블로흐의 “Not-Yet”
*해당 브런치북은 '친근한 인문학'을 지향하고 있어, 제 다른 글들보다 편안한 문체로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현재에 없지만 언젠가 이루고 싶은 무엇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학생은 졸업 후의 꿈을 꾸고, 힘든 시기를 겪는 사람은 “곧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떠올립니다. 이러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대한 기대와 꿈은 우리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곤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아직-아님(Not-Yet)”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현실 세계 자체가 마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처럼 늘 열려 있고 미완성 상태에 있다고 보았지요. 그렇다면 블로흐가 말한 아직-아님이란 정확히 무엇이고, 왜 중요한 걸까요? 이제부터 이를 좀 더 친근한 예시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블로흐의 철학에서 “희망”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가능성의 빛을 발견하려 했습니다. 위 사진 속 어둠 속의 ‘HOPE’ 조명처럼, 현재의 고통이나 결핍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희망의 불씨가 반짝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블로흐에게 “아직-아님”은 단순한 낙관이 아닌, 현실 속에 존재하는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잠재적 현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희망의 빛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아직-아님의 개념부터 차근차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아직-아님”은 말 그대로 “아직 ~이 아닌 것”을 뜻합니다. 이는 현재 실현되지 않았지만 장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데요. 예를 들어 씨앗을 생각해봅시다. 손바닥 위의 작은 씨앗은 지금은 그저 씨앗일 뿐이지만, 아직-나무가-아닌 상태일 뿐 언젠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씨앗 안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블로흐는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미완성이고 불완전하지만, 그 속에 더 나은 미래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블로흐는 현실을 “열려 있는 과정”으로 이해했는데, 이는 현실이 항상 무언가를 향해 진행 중이며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소원을 이루거나 꿈을 달성한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그때 “아, 이제 완벽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라고 느끼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새로운 바람이 생겨나거나, 이루어진 꿈 너머에 다른 목표가 보이기 마련입니다. 블로흐는 바로 이러한 충족 후에도 남는 ‘잔여’에 주목했습니다. 어떤 소망이 이루어져도 완전히 충족되지 않고 남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현실에는 항상 현재로 다 채울 수 없는 부족함과 가능성이 공존하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보았습니다.조금 더 일상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어린아이가 “나는 커서 우주비행사가 될래”라고 말할 때, 지금 그 아이는 우주비행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아직-우주비행사-아님의 상태, 즉 장차 우주비행사가 될 수도 있는 희망과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인류는 하늘을 나는 기술이 없었지만 비행에 대한 꿈은 꾸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하늘을 나는 기계를 그려보던 시절엔 그것이 아직-현실이-아닌 상상이었지만, 훗날 비행기가 발명되어 인간은 결국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이렇듯 현재는 아니지만 언젠가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아직-아님의 세계입니다. 블로흐는 이런 인간의 꿈꾸기와 실현의 과정을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바라봤습니다.그는 현재 속에 미래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데요, 어려운 철학 용어로는 현실 세계를 “실재적 가능성(real possibility)”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세상이 그저 주어진 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 모습을 스스로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기 안에 나중 모습인 나무를 품고 있듯이, 우리 현실도 그 안에 여러 미래의 모습들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은 항상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고, 우리는 그걸 발견하고 실현해가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흥미롭게도 블로흐는 이런 아직-아님의 감각을 단지 개인적인 꿈이나 공상에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유토피아적 기능”이라고 불렀는데, 쉽게 말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상상력과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블로흐가 말하는 유토피아(이상향)는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콘크리트(구체적) 유토피아”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뜬구름 잡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씨앗처럼 자라나 구체화될 수 있는 희망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모두가 평등하고 착취와 소외가 없는 사회는 블로흐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궁극(Ultimum)”의 모습인데요, 이는 막막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싸워 이루어가야 할 목표로 제시됩니다. 정리하면, 아직-아님이란 지금은 아니지만 현실에 뿌리박은 채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희망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로흐의 아직-아님이라는 독특한 개념은 그가 접한 여러 사상적 전통과 격동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싹텄습니다. 우선 철학적 뿌리부터 짚어보겠습니다. 블로흐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씨앗 속에 나무의 잠재력이 들어있듯이, “잠재태(가능태)”가 현실세계에 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 앞서 말한 대로 물질(현실) 자체가 미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이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앞으로 변해갈 수 있는 가능성의 과정으로 본 것이죠. 이러한 “과정철학”적인 태도는 블로흐 철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블로흐에게 결정적인 사상적 영향은 마르크스주의, 특히 칼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적 비전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넘어 계급 착취가 없는 해방된 사회를 꿈꾸었는데, 블로흐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꿈을 희망의 철학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경제적 분석에 인간의 주관적 열망과 문화적 상상력을 결합시켰습니다. 예컨대 블로흐는 동화나 예술, 종교 속에서도 억눌린 민중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독창적 통찰이었지요. 실제로 블로흐는 종교의 역할도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교를 단순히 “인민의 아편”이라며 부정적으로만 봤던 반면, 블로흐는 종교가 보여주는 구원과 천국에 대한 꿈 역시 인간의 아직-아님, 즉 해방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가령 성서에 나오는 “약속된 땅”이나 “메시아(구원자)를 기다리는 믿음” 같은 것은 현실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간절한 갈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세속적인 혁명 사상과 만날 때 진정한 변화의 힘이 된다고 믿었고, 실제로 종교적 혁명가인 토마스 뮌처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뮌처는 종교적 신념으로 농민반란을 이끈 16세기 인물로, 블로흐는 그를 혁명의 신학자로 재조명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블로흐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도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억압되어 의식에서 사라진 것, 즉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이에 반대하여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Not-Yet-Conscious)”이라는 개념을 내놓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단순히 잊혀진 과거의 상처만 있는 게 아니라,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미래의 열망과 꿈도 있다는 겁니다. 블로흐는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을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으로 본다고 비판하면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았지만 미래를 향한 동경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인간을 움직이는 심리적 동기가 과거의 트라우마뿐 아니라 미래의 희망에서도 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까지 할 수 있겠지요.
블로흐의 사상 형성에는 헤겔 철학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헤겔은 세계 역사가 “절대정신”의 자기전개 과정이며 결국 완성(절대 지)으로 수렴한다고 보았는데, 블로흐는 이 점에서 헤겔을 비판했습니다. 헤겔의 역사 철학은 매우 체계적이고 폐쇄된 완결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것이 마치 미리 예정된 진리를 향해 회귀하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헤겔의 관점을 “회상적”(anamnesis)이라며, 과거의 본질을 되찾는 식으로 미래를 설명하는 것은 진정한 새로움을 놓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역사에 열린 결말이 필요하다고 보았어요. 즉, 역사는 과거의 어떤 원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전혀 없던 진정한 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헤겔의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죠. 이를 위해 변증법적 사고를 유지하되, 완전히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 열려있는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블로흐는 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친구 게오르그 루카치와도 논쟁을 벌였는데, 루카치가 헤겔식의 닫힌 전체성을 중시한 반면 블로흐는 끝없는 열린 가능성을 옹호했습니다.)
이렇듯 아직-아님이라는 개념 배후에는 철학사상의 큰 흐름들이 얽혀 있지만, 동시에 블로흐 자신의 삶의 경험과 20세기 역사가 깔려 있습니다. 블로흐는 1885년에 태어나 1977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인생 자체가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혁명, 그리고 냉전 체제를 몸소 겪었지요.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그의 철학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었습니다.먼저 1차 세계대전 시기를 보겠습니다. 블로흐는 젊은 시절부터 군국주의를 싫어하여,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고향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전쟁을 지지하던 당시 많은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전쟁을 반대했죠.
이 망명 중에 그는 <유토피아의 정신>(1918)이라는 첫 번째 주요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보며, 절망 속에서도 인류가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의 불씨를 이 책에서 노래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당시 분위기에서, 블로흐는 낡은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상 사회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떠한 혁명도 인간을 억압하는 새로운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습니다. 실제로 <유토피아의 정신> 초판 서문에서 블로흐는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유토피아”를 비판하며, 구체적 삶 속에서의 해방을 강조했습니다.이후 나치즘의 등장은 블로흐 철학의 시험대와도 같았습니다. 블로흐는 유대인 배경의 좌파 지식인이었기에,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잡자 즉시 독일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내 카롤라는 지하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터라 부부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스위스와 프랑스 등을 떠돌다가 결국 1938년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폭압과 광기가 휘몰아치던 시대, 블로흐는 망명지에서 희망의 철학을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는 미국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그 고립 속에서 방대한 저작 <희망의 원리> (The Principle of Hope)의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49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독일 민주공화국)에 정착해 대학에서 가르치며 집필을 마무리합니다. <희망의 원리>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대작으로 1954년부터 1959년에 걸쳐 출판되었는데, 여기에서 블로흐는 자신이 평생 탐구한 희망과 아직-아님의 철학을 집대성했습니다.흥미로운 사실은, 블로흐가 처음엔 동독 체제에 협력적이었지만 곧 사회주의 정권에 비판적으로 변해갔다는 점입니다. 그는 동독 정부가 보여준 경직성과 탄압에 실망했고, 자유를 향한 희망마저 억압하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결국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해에 블로흐는 서독으로 망명을 결심합니다. 훗날 그는 이 결정을 가리켜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뛰어넘은 것”이라고 묘사했지요.
이처럼 현실 사회주의마저 미완의 과정으로 보고 더 나은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 태도는, 블로흐 자신의 삶이 아직-아님의 철학을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서독 튀빙겐 대학에서 교수직을 이어가며 그는 서구 학생운동과 평화운동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자들과 대화하면서 종교와 마르크스주의 간의 희망 담론을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이나 유토피아적 사회운동 등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령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블로흐의 개념을 빌려와 기독교 복음서의 희망 메시지와 현실 사회변혁을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가 블로흐의 아직-아님이 얼마나 폭넓은 공감을 얻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블로흐의 “아직-아님”이 주는 철학적·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살아가는 새로운 태도를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블로흐는 우리에게 세계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커다란 인식 전환을 요구하지요. 흔히 사람들은 현실을 “원래 그런 것” 혹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하곤 합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현실을 항상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으로 보라고 권합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부정적 모습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그 안에 숨어있는 긍정적 가능성의 싹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아주 낙관적인 동시에 혁명적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아직 오지 않은 무엇”을 현실의 일부로 포함시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블로흐는 심지어 “세상 전체가 꿈꾸고,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까지 말했는데요, 이는 희망이 단순히 개인의 주관적 바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근본 성질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쉽게 풀면, 우리가 꿈꾸는 것은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를 통해 꾸는 꿈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아직-아님의 의미는 매우 큽니다. 블로흐의 철학은 희망을 행동의 에너지로 승화시킵니다. 그는 희망을 막연히 손 놓고 바라는 태도(기복적인 희망)와 구분하여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희망”으로 보았습니다. 그냥 언젠가 잘 되겠지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 있는 가능성을 붙잡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블로흐는 희망을 “행동하는 원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돌아보면, 노예제가 당연하던 시절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아직-아님의 신념이 있었기에 노예해방이 이뤄졌고, 왕정 치하에서 공화국의 꿈이 있었기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았습니다. 이렇듯 현실에 없는 것을 믿는 힘이야말로 역사를 바꿔온 힘인 것이지요. 블로흐는 이러한 희망이 막연하거나 맹목적이어선 안 되고, 현실에 뿌리를 둔 깨어있는 희망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이 “언젠가 로또에 당첨될 거야”라고 믿는 것은 막연한 기대에 불과할 수 있지만,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내 삶을 바꿀 수 있어”라는 희망은 보다 현실에 기반한 희망일 것입니다. 블로흐는 후자의 희망, 즉 현실의 흐름 속에서 싹트는 희망을 강조한 것입니다.또한 아직-아님은 현실 비판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보면서 “왜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힘이 됩니다. 블로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직시하는 것, 거기에서 더 나은 가능성을 찾는 것이 곧 비판이며 진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닌 미래에 대한 동경을 통해 현재를 평가하라고 제안합니다. 예컨대, “우리 사회는 아직 정의롭지 못하다”라고 말할 때 그 아직이라는 말 속에는 “앞으로는 정의로워져야 한다”는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직-아님은 현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변화를 촉구하는 촉진제 역할을 합니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도, 아직-아님은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시련을 겪고 좌절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블로흐의 철학은 조용히 말해줍니다. “지금의 너는 아직 완성된 네가 아니다.” 현재의 실패나 아픔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며, 나는 아직-아님의 존재라는 깨달음은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오늘의 내가 비록 원하는 모습과 거리가 멀어도, 아직-아님이 있다는 것은 곧 “내일은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블로흐는 두려움보다는 희망에 기반한 상상력을 가져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두려움 역시 미래를 예상하지만, 희망과 달리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종종 “이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미래를 걱정하지만, 블로흐는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으로 스스로를 북돋우라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열려 있으니, 가능한 긍정적 시나리오를 그리며 나아가는 편이 삶을 발전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블로흐의 아직-아님은 공동체적인 희망의 중요성도 일깨웁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더 나은 무언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블로흐에 따르면 이러한 집단적인 희망의 에너지가 모일 때, 혼자서는 이룰 수 없던 일들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술, 음악, 문학, 종교 등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공유해온 이상향의 이미지들에 주목했는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사회가 함께 꾸는 꿈이라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이상사회에 대한 옛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작품으로 그려져온 것은, 인류가 늘 공동의 희망을 나눠왔다는 증거입니다. 블로흐는 이런 집단적 꿈이 그냥 꿈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의 변화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사회의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 운동도 따지고 보면, 아직-아님인 세상을 향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꿈이 결집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블로흐의 사상은 함께 꾸는 꿈의 철학, 연대와 희망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아직-아님” 개념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허황된 환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 싹튼 미래입니다. 블로흐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더 나은 가능성을 붙잡아라.” 이는 각자 개인의 삶에서든, 사회 공동체의 삶에서든 유효한 조언일 것입니다. 물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때때로 실망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꿈꾸던 미래가 쉽게 오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블로흐는 말합니다. 희망이 반복해서 좌절당해도, 아직-아님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는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더 나은 것을 향한 갈망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고, 바로 그 점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직-아님의 철학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와 같습니다. 지금 여기의 어둠을 뚫고 희미하게나마 비춰오는 한 줄기 빛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도록 우리를 이끌지요.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삶과 사회를 움직이는 희망의 원리, 아직-아님의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오늘의 불완전함을 내일의 성장으로 바꿀 용기가 생겨납니다. 언젠가 누군가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듯, 지금 우리가 꾸는 꿈 또한 언젠가 미래의 현실이 되어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믿고 준비할 때, 비로소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도 가능성의 문을 열게 됩니다. 블로흐의 철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아직-아님”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마음에 간직한 채,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나갈 것. 이 간결한 진리가 블로흐가 남긴 깊은 울림이며, 우리 모두 곱씹어볼 만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