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맨몸의 연극

아감벤과 ‘벌거벗은 생명’

by 새솔

현대 사회에서 종종 국가 권력과 개인 생명의 관계가 첨예한 이슈로 떠오릅니다. 전쟁 속 난민이나, 테러와 전염병에 대응하는 비상조치 속에서, 인간은 때로 최소한의 “맨몸의 생존”만을 보장받을 뿐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배제되곤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 영어: bare life)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아감벤은 이 개념을 통해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고대 로마의 인물상과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을 연결지어, 현대 주권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맨몸의 생존까지 포괄적으로 지배하는지 분석합니다.


벌거벗은 생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벌거벗은 생명’은 한마디로 “정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오직 생물학적 생존만 남은 인간의 삶”을 뜻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것은 모든 사회적∙법적 지위와 권리가 벗겨진 상태임을 강조합니다.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에서 이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는데, 책의 주인공이라 할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법에 나타나는 인물로,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해 누구나 벌을 받지 않고 죽일 수 있지만, 종교적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법의 보호 밖에 있으면서도 (죽임 당할 수 있다는 형태로) 법 질서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나 존엄은 모두 박탈당한 채, 오직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사실만이 남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합니다.


아감벤은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어의 두 가지 삶의 개념을 참고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조에(zoē)와 비오스(bios)라는 말로 삶을 구분했는데, 조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 공통된 단순한 생물학적 삶을 의미하고, 비오스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형태, 특히 정치적 삶을 가리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정치 공동체(polis)에서는 이러한 벌거벗은 삶(조에)은 배제되고 정치적 삶(비오스)만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 배제된 맨몸의 삶이야말로 정치 질서의 기초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정치적 존재이기 이전에 생물학적 존재이고, 정치 공동체는 겉으로는 조에(벌거벗은 생명)를 제외한 채 운영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제외된 생명을 토대로 성립해왔다는 것입니다. 아감벤의 핵심 주장은 정치와 맨몸의 생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근대에 이르러 이 맨몸의 생명이 드러나 정치의 중심 문제로 부상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벌거벗은 생명은 법과 권리의 옷을 모두 강탈당하고 남은 “맨몸의 삶”이며, 호모 사케르라는 극단적 사례를 통해 그 개념이 상징적으로 표현됩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사상의 배경이 된 철학적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권력의 손길, 생명을 움켜쥐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 구상은 이전 세대 사상가들의 논의를 계승하고 변형한 결과입니다. 특히 미셸 푸코와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먼저 푸코는 현대사회에서 권력이 생명 그 자체를 관리하고 통제하게 되는 양상을 “생명정치(biopolitics)”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전근대의 권력이 “죽게 하거나 살려두는” 전제군주적 권력이었다면, 근대 국가 권력은 사람들을 살리고 관리하는 권력, 즉 인구의 건강, 위생, 출산, 수명 등 삶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는 이를 “생체권력(biopower)”이라고 부르며, 인류의 생물학적 존재 자체가 국가 정책과 권력의 핵심 문제가 된 시점을 근대의 출발로 보았습니다. 푸코는 “근대인은 자신의 정치가 생물학적 삶을 문제삼는 동물”이라고까지 말하며,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몸과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지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푸코의 통찰은 아감벤에게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한 가지 “보완 혹은 교정”을 제시합니다. 생명정치와 주권 권력 간의 숨은 연결고리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권 개념에는 정치신학자 카를 슈미트의 이론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는 자”, 즉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법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최고 권위자로 정의했습니다. 주권자는 법 질서의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 위에 서서 (예외를 선언함으로써) 법을 유보할 수 있는 모순적 위치를 지닙니다. 아감벤은 이 주권 권력의 역설에 주목하여, 법이 일정한 경우 스스로를 중지시킴으로써 오히려 생명에 개입하는 구조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법이 예외상황에서 효력을 멈출 때 오히려 그 밖의 맨몸의 생명에 법이 직접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권 권력은 인간의 삶(조에)을 법질서에 포함시키되 동시에 배제하는 “포함적 배제(inclusive exclusion)”의 형태로 작동합니다.


요약하면, 푸코는 근대 권력이 인간의 생물학적 삶을 정치의 중심에 놓은 것을 밝혀주었고, 슈미트는 주권 권력이 법의 예외를 통해 삶을 좌우하는 힘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아감벤은 이 둘을 결합하여, “주권은 본질적으로 생명정치적”이며 국가가 예외상태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해낸다고 주장합니다. 근대에 등장한 생명에 대한 새로운 권력이 사실은 서구 정치의 시작부터 내포된 구조였음을 지적한 것이죠. 이렇게 형성된 벌거벗은 생명 개념은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왔습니다.


배제된 자들의 연대기


로마의 호모 사케르: 법이 버린 생명


앞서 설명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역사적으로 벌거벗은 생명의 원형이라 할 만한 사례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 등에 대해 적용된 이 조치는,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추방함과 동시에 그의 생명에 대한 살해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실행되었습니다. 호모 사케르는 종교적 의식에 바칠 수 없을 만큼 ‘속된’ 존재이지만, 누구나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기에 일종의 ‘신성한 저주’가 내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법적으로는 완전히 배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죽음당할 수 있다”는 형태로 법 질서에 포섭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모 사케르는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고 오직 “죽임당할 수도 있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남게 됩니다. 로마법의 호모 사케르 사례는 정치공동체가 자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한 인간을 법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오히려 그 생명을 전적으로 지배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는 서구 주권 권력의 밑바탕에 깔린 보편 구조로서, 이후 역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 수용소의 맨몸의 삶


20세기 역사에서 벌거벗은 생명이 극단적으로 현실화된 비극으로 홀로코스트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는 아감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는 “수용소가 현대의 숨겨진 규칙(nomos)이며, 정치가 생명을 완전히 지배하는 생명정치의 극단적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철저히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했습니다. 법의 보호도, 정치적 발언권도 없이 오직 죽지 못해 살아있는 생물학적 존재로 취급된 것입니다. 실제로 수용소에서는 개인 이름 대신 번호가 부여되고,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이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완전히 국가 권력에 예속되어, 말 그대로 “벌거벗은 생명만이 남은 채(raw life completely dominated)” 존재하게 됩니다. 아감벤은 전체주의 정권이 이러한 수용소를 통해 정치와 생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완전한 맨몸의 삶 상태로 만들어버린다고 분석했습니다. 수용소는 “예외상태가 상시화된 공간이자, 주권 권력이 벌거벗은 생명을 노골적으로 다루는 곳”이며, 그래서 “모든 것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해지는 공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벌거벗은 생명 개념이 단지 이론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 비상사태와 근대 주권: 예외가 규칙이 될 때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의 관계는 전쟁이나 위기 시에 선포되는 국가 비상사태(예외상태)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비상사태란 정부가 전쟁, 반란, 테러, 전염병 등의 위기에 대응하여 일시적으로 헌법이나 법률상 보장된 권리를 제한하거나 법 적용을 유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예외상태에서는 법이 평소와 다르게 작동하기에, 일반 시민들도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적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 시기의 계엄령이나 독재 정권의 긴급조치 하에서는 체포∙구금∙처형 등이 법적 절차 없이 자행되기도 하며, 평소라면 불법일 행위가 “국가안보”나 “공공안전” 명목으로 시행됩니다. 나치 독일은 의회 방화 사건을 빌미로 무기한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헌법상의 기본권을 정지시켰고, 그 결과 반대파나 소수자들을 법 절차 없이 처벌하고 수용소에 보내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처럼 예외상태가 장기화되면 법과 비법의 경계가 무너지고, 예외가 곧 규칙이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아감벤은 이를 “현대에는 예외상태가 상시적인 통치 기법이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시민이 잠재적으로 법 밖의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할 위험을 경고합니다. 실제로 9·11 테러 이후 많은 국가들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특별법, 애국자법 등을 통해 용의자에 대한 기본권 제한, 고문적 심문, 기한 없는 구금 등을 시행했는데, 이 역시 현대판 호모 사케르를 양산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안전”을 명분으로 언제든 예외상태를 선언하여 개인의 권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누구나 어느 순간 벌거벗은 생명 상태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정치철학적 경고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주변부: 난민, 이주민과 감염병 관리


오늘날에도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난민과 불법 이주민의 처지입니다. 국적 국가 밖으로 밀려난 난민들은 아렌트가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종종 캠프나 구금 시설에서 최소한의 생존만 유지합니다. 이들은 어느 국가의 시민도 아니기에 법적 보호의 공백 지대에 놓여 있으며,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습니다. 예컨대 시리아나 로힝야 난민이 머무르는 캠프에서는 생필품 지원 등 생물학적 삶은 유지되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나 미래에 대한 보장은 불투명합니다. 아감벤은 1990년대 알바니아 난민들이 이탈리아 축구경기장에 집단 수용되었던 사례 등을 언급하며, 현대의 난민 캠프를 사실상의 ‘현대판 수용소’로 보기도 했습니다. 국가 영토 내이지만 법이 부분적으로만 적용되는 예외 공간에서, 난민들은 맨몸의 생존만 남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전 지구적인 감염병 유행 역시 벌거벗은 생명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사태를 낳았습니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을 겪는 동안 각국 정부는 시민들의 이동과 모임을 제한하고, 격리와 통제를 통해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살아있음”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전례없는 권력 행사를 한 경우라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도시 봉쇄나 자가격리 조치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일시 정지시키는 대신 순수한 생물학적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철학자 아감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우리 사회가 이제 벌거벗은 생명 외에는 어떤 가치도 믿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자유와 권리를 거의 모두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에 이어 감염병 위기도 하나의 예외상태를 낳았고, 국가들은 끊임없이 시민들을 맨몸의 생명으로 환원시켜 관리하려는 유혹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공중보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옹호도 존재하지만, 아감벤의 지적은 생명 보호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권리가 얼마나 쉽게 유예될 수 있는지 경고하는 차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일상 속 ‘벌거벗은 생명’


철학적 논의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니, 일상적이거나 가상의 사례로 개념을 비유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예로, 어떤 나라에서 하룻밤 동안 모든 법의 효력이 정지되어 살인이나 폭력이 처벌받지 않는 날을 떠올려봅시다. (할리우드 영화 <더 퍼지(The Purge)>가 바로 이런 설정을 보여줍니다.) 그 날이 오면 평범한 시민들도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공격당해도 국가나 경찰이 지켜주지 않고, 가해자도 처벌받지 않으니,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생명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벌거벗은 존재로 전락합니다. 평소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법의 “예외 상태”가 선언되어 법적 권리가 무력화되면 우리 모두는 이처럼 호모 사케르와 비슷한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왜 아감벤이 법과 권리가 제거된 “맨몸의 삶”에 주목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법치와 시민권이란 옷을 모두 벗겨냈을 때 남는 것은 벌거벗은 생명뿐이며, 정치권력은 때로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을 만들고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주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떠한 정부도 법도 없어, 오직 생물학적 생존만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이나 질병, 자연재해로부터 살아남는 문제만 직면하게 되고, 사회적 신분이나 시민의 의무 같은 것은 무의미해집니다. 물론 이는 자연상태에서의 벌거벗은 삶이지만, 전쟁이나 재난 시기의 무정부 상태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벌거벗은 생명이란 인간이 사회적 껍질을 모두 벗고 남은 순전한 생존의 모습이며, 아감벤은 이러한 상태가 현대의 법과 정치 체계 속에서 의도적으로 (또는 구조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권력과 생명의 경계에서


‘벌거벗은 생명’ 개념은 현대의 정치철학 담론과 현실정치 모두에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우선 철학적으로, 아감벤의 통찰은 근대 정치의 은폐된 기제를 폭로했습니다. 즉, 인권과 시민권의 보편적 존중을 표방하는 현대 민주국가조차도 근원적으로는 생명을 예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주권적 힘을 지니고 있으며, 위기 상황에서는 어떤 삶을 보호하고 어떤 삶을 배제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 개념은 우리가 당연시했던 법 질서의 인간 보호 기능이 사실은 조건부일 수 있으며, 주권 권력이 설정한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누구나 무권리 상태에 놓일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인권의 최후 보루로 여겨지는 국가조차도 이중적 얼굴을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현대 정치철학에서 주권과 인권의 긴장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이 개념은 우리의 사회적 각성을 촉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전쟁난민, 무국적자, 구금된 이민자, 팬데믹 속 격리자 등 법∙제도 밖에서 생존만 부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에게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벌거벗음”을 입혀주는 일, 즉 다시 인간의 존엄과 권리의 옷을 입히는 일은 전 지구적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감벤의 경고처럼, 만약 우리가 예외상태의 상시화를 용인한다면 우리 모두가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과 권리가 일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유지될 수 있는 장치,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기본권을 완전히 박탈하지 않는 안전장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벌거벗은 생명’ 개념은 우리에게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아니면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아야만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아감벤은 이 어려운 질문을 던지며, 현대 사회가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성찰하도록 합니다. 그의 통찰은 전체주의의 폭력, 국가권력의 양날의 검, 인권의 보편성과 허약함 등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정치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벌거벗은 생명은 단지 철학용어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 속 권력과 생명의 관계를 꿰뚫어보는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인간의 생명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함부로 “벌거벗겨지지” 않도록 지키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4화하찮은 것의 심오한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