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쌍꺼풀 오이씨 Mar 27. 2020

아이는 나에게 온 손님이다.

아이를 존중하자. 그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 엄연한 독립된 인격체이다.

 이미 다른 글에서 썼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존중하면서 키우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육아에 관한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이야기 해 줄 때, 나는 내가 끼어들 틈이 보이기만 하면 '나는 아이들을 내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할 거다. 아이들은 나보다 미숙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살아가는데 좀 어색하고 훈련이 덜 된 것 뿐이다.' 말들을 했었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동반자? 동반자? 언제까지 같이 갈거라고 동반자이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언젠가는 내 품을 떠날테니 동반자라기 보다는 손님으로 대하는 것이 더 맞겠다는데 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동반자는 무언가 생각도 일부러 맞춰야 할건데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좀 더 불리한 건 당연하고,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져주는 것도 이상하고 등등, 동반자는 동일한 목적을 행해 나아가는 무리인데, 아이들 자신의 인생 목표나 가치관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덜컥 동반자라고 하니 그건 아니지 싶어서 손님으로 했다.

 손님. 적절하지! 암! 손님은 내가 극진히 모셔야하지만,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모시는것도 아니고, 나도 나만의 공간을 유지하고, 손님도 그들의 공간을 당연히 지키고. 그리고 당장은 상상도 되지 않고, 실감도 안나지만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날테니 손님으로 대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 광활한 우주로부터 나에게 온 손님이다. 아주 존귀한 손님. 대접받아 마땅한! (그렇다고 응석받이로 키우거나, 내가 헬리콥터 퐈더가 되는 것은 결사반대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지금 내 품에 안겨 꼬물락 거리는 이들을 손님으로 극진히 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방법적인 면을 생각했다. 그래서 꼭 하기로 한 것이 대략 4가지 정도이다.


1. 경청 : 무슨 말을 하든 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기

2. 말투 : 듣기만 하면 뭐하나,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고와야지.

3. 거짓말 안하고 잘 설명하기 : 이건 아주 오래 전 부터 생각했던 것인데, 예를 들면 아이들이 음식점에서 떠들거나 뛰어 다닐 때 그 아이들을 진정 시키려고 어른들이 '너 그러고 다니면 경찰아저씨가 와서 잡아간다.' 혹은 '저기 무섭게 생긴 주인아저씨가 이놈! 한다.' 따위의 어른 편하자고 하는 말들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러지 않기로 했다. 거짓말이니까.

4. 약속지키기 : 아이들과 한 약속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도 꼭 지키자. 아무리 아가라도 다 알아듣고, 다 기억하고 있다.



1. 경청


 생각보다 일찍 끝까지 들어 주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름 표현하기 전에는 이런 식이었다. 예를 들어 외출하려고 외출복으로 갈아 입을 때, 대부분 그냥 이거입자. 하지 않았다. 두벌의 옷을 가져와서 '어떤 옷 입고 싶어?' 하고 물어봤다. 아는 동생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러면 애가 대답을 해?' 하고 물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선택을 하는 상황은 당연한거고, 아이들이 자기 의사를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튼 물어보면 아이들이 허우적대든, 어떻든 손에 걸리거나, 눈으로 빤히 보는 옷을 입혀 주었다. 이게 경청이랑 뭔 상관이냐 하겠지만, 아이들이 내 물음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때 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요즘은 '오늘은 줄무늬 입고 싶어요.' 라든지 '이거 말고 글자잠바(상표가 크게 쓰여진)입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너무 귀엽다 *.*)


 만 2살 지나고 '응'이나 엄마, 아빠 정도의 말만 했었다. 당연히 내 귀에도 누구 집애는 나름 말을 한다는데, 육아서에 만 2세 아이는 한 번에 두 마디 정도의 말을 한다던데 정도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약간 신경 쓰이긴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뭐 걔는 그런갑지. 나도 말할줄 알고, 아내도 말 할 줄 알고 그러니까 쟤네도 언젠간 하겠지. 혹 그러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법있으니 뭐 어때. 하고 스쳐 지나가려고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애들이 말이 확! 정말 하룻밤 사이에 확! 늘었다. 쌍둥이라서 그런지 탁구하듯 주고 받고 하면서 어제는 1호가 하던 말을 오늘은 2호가 하고, 오늘 2호가 하던 말을 내일은 1호가 하고 이런 식으로 둑 터진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질문도 확! 늘었다.

 아이들이 질문할 때 가만히 보면 굉장히 재미있고, 경이롭다. 자기가 궁금한 게 분명히 있는데 그걸 말로 하려니 어려운가보다. '근데''근데''근데' 이런 반복이 이어지는 것도, 말이 입가에 맴돌아 입술을 오물오물하며 말을 뱉지 못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 대견하다. 그럴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의 추임새만 넣어주면서 말을 마칠 때 까지 기다려주면 너무 좋아한다. 엄마나 아빠에게 질문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것도 너무 좋다.

 어떤 때는 질문하고 싶은데 말이 생각나지 않아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때도 있다. 그럴 때 안아주면서 무슨 질문을 하고 싶었는지 나도 조근 조근 여러가지를 말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원하는 문장이 나오면 '응!' 하고 울음 뚝! 미소 활짝~ 봄 꽃이 따로 없다.

 어떤 날은 자기 전 책 읽기 하는데 중간 중간 질문을 끝도 없이 해서, 잠 드는 시간이 너무 늦어진 날도 있는데,  이런 날 경청은 반은 실패, 반은 성공하는 것 같다. 너무 피곤해서 짜증을 막지 못하기도 하고, 속으로 '짜증내지 말자. 짜증내지 말자.' 뇌까리면서 버티기도 하고 좀 왔다 갔다 한다.


 여튼 오만 상황에서도 아이들 말을 끝까지 들어주다 보니 아이들은 당연히 재잘대지만, 그냥 하는 말 보다는 자기 의사를 잘 표현 한다. 얼마 전엔 이런 이야기도 했다. 동네 산책 나갔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니까 2호가 '우리 바람 부니까 빵집 가야해요. 빵집은 바람 안 불고 따뜻하니까요.' 그래서 빵집 가서 따끈한 우유에 빵 하나씩 먹고 왔다. (논리인지? 우기기인지?)



2. 말투

 

 우리 쌍둥이들은 이제 막 세 돌을 지났다. 그런 집도 있고 아닌 집도 있지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있다. 자려고 불을 끄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누가 아빠 품에서 잘 거예요?' 그러면 그날그날 자기 기분에 따라 나와 함께 자고 싶은 아이가 대답을 한다. '나요' 혹은 자기 이름을 이야기한다. '쥬니요~' '다미요~' 어떤 날은 둘 다 한 명에게 안겨 자려고 한다. 그러면 혼자 자는 나 혹은 아내는 살포시 미소(아는 사람만 아는 그 미소)

 아이들은 팔베개를 해 달라고 한다. 심지어 자다가도 팔베개해 달라고 한다. 주로 하는 말은 '아빠 팔베개 필요해요.'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신기했다. 무슨 애가 자다가도 존댓말을 하나... 그런데 생각을 해 보니 존댓말 반말은 개념을 나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지 저 아이들에게 뭔 상관이지 싶었다. 그래도 귀엽고 신기하다 *.*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팔베개를 해 주었었다.


 그래도 반말보다는 존댓말이 훨씬 낫다.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 존댓말을 할 때는 좀 더 생각을 해서 이야기를 하고, 말의 톤이나 속도, 어휘 등을 존댓말에 맞추려고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반말은 그냥 말 그대로 반말이다. 말하기 편하니 말도 쉽게 하게 되고, 감정이 겪해진 상황에서는 마구마구 말을 해 댄다. 마구 쏘아댄 말에 상처받은 아이를 보며 밤에 자는 아이옆에서 눈물 흘린 적이 있다. 이건 아이도 슬프고 나도 슬프고......

 아이들이 말할 때를 관찰해 보니 아이들도 나와 똑같다. 존댓말을 쓸 때는 나름 생각하는 게 눈에 확연히 보이지만, 반말을 할 때는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을 때이다. 화가 나있거나 감정적으로 주체가 안될 때 등이다. 아이들에게 존댓말은 이런 거야, 반말은 이런 거야 하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존댓말이 풍기는 분위기와 반말이 주는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말을 전달하는 포장지 일뿐인데도 말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게 된 이유가 있다. 몇 번 이야기 했지만, 아내가 임신 중일 때 아내에게 아이들을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로 대해 주자고 했다.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아이들의 내면은 무한한 존재, 존귀한 존재임은 당연하다. 다만 밖으로 표현하는 표현 방식이나 스킬이 좀 어색(모자라다는 것도 온당치 않은 표현이다.)할 뿐이다.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이유 때문에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존댓말보다 먼저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최대한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기. 이건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했던 것이다. 엄마가 무엇을 먹었는지, 엄마와 아빠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난 후도 마찬가지였다. 눈도 못 맞추고 옹알이조차 하지 못했을 때도 어디 가면 어디 간다. 그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다. 언제 돌아올 것이다. 등등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하려고 했다. 교육적 목적이나 아이들의 발달에 자극을 준다거나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냥 내 눈앞에 있는 존재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이니 어른처럼 대했을 뿐이다. 신체가 성장하지 않았을 뿐, 정신과 인격은 독립된 개체니까.

 이렇게 대하다 보니 기억나는 일들도 생겼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 일이다. 동창 가족과 식사를 한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 날 아이들은 달디 단 과자를 정말 푸지게 먹었다. 아직 집에서는 시판 과자(그냥 마트에 흔히 파는 과자. 달디 단.......) 먹이기 전이었다. 동창이 나름 조카들 챙겨준다고 눈 앞에 두었다. 아직 말을 제대로 하기 전이어서 손짓과 눈빛 그리고 응! 정도의 단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였다. (그때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이야기를 했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이들이 과자를 보며 이게 뭐 냐고 물었다. (그때 아이들은 분명 나에게 '아빠 이게 뭐예요?' 하고 물었는데 내 동창은 '애들 뭐하고 하는 거야?'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나름 뿌듯했던 ^^*) 그래서 과자라는 건데, 밥으로 먹는 건 아니고 간식으로 먹는 거다. 먹으면 재미있고 좋아요. 뭐 이 정도 답을 해 주었다. 아이들은 만드는 방법이 궁금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만드냐고 물어보길래, 밀가루에 물을 섞어서 주물럭주물럭하면 반죽이라는 게 생기는데 거기에다가 설탕 넣고, 또 맛있어지는 거 넣고 한 다음에 뜨거운 오븐에 넣고 굽는 거다. 이렇게 설명을 했다. 아이가 이해가 안 됐는지 또 물어봤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었을 것 같은 지점에서는 설명을 더 추가해서 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아이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내 질문은 조금씩 업그레이드되어가고...... 음 한 20번 정도 설명을 했던 것 같다(그때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나는,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친구 아들이 가만히 나를 보더니 '삼촌, 안 지겨워요? 왜 자꾸 물어보고, 왜 자꾸 설명해줘요?' '안 지겨운데, 궁금하니까 물어보겠지, 나는 알려주고 싶고' '근데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요.' '괜찮아. 못 알아들으면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냥 난 설명을 해주면 되고, 궁금하면 또 물어보겠지. 나름 재밌어'


 

 아이들을 존중하다 보니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말의 형식도 바뀌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존댓말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대화를 존댓말로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못 하고 있다는 게 맞겠다. 가끔 욱할 때는 반말이 앞서고, 뭐 그렇다( 그럴 땐 나의 미성숙함을 자책한다....ㅠ.ㅠ) 그래도 존댓말을 하는 건 정말 잘한 선택 중에 하나이다.

 슝~ 하고 날아와서 나에게 쿵! 하고 부딪힌 해성 같은 두 존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저 하늘 멀리에서만 보이던 별이 내 눈앞에 떡! 하니 있는데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 대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존댓말을 하게 되고, 더 존중하게 되고 나름 선순환이다.



3. 거짓말 안하고 잘 설명하기


 앞에 간단히 쓴 이유처럼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겠다고 거짓말을 쉽게 하는 어른들의 대처가 너무 싫었다. 그냥 싫었다. 그리고 애들 키워보니 거짓말은 대번에 알아 차린다. 부모가 거짓말 하는데 아이들이 안할까......

 물론 저런 식의 거짓(협박)을 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부모는 얼마나 힘들꼬........ㅠ.ㅠ 그래도 아닌건 아니다.

 아이들도 합리적 사고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한 번에 이해하는 건 습관화 되어 있지 않지만, 설명을 하고 이해 시키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부모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말을 듣는다. 당장은 안들어도 언젠가는 듣는다. 그리고 그 만큼 이해와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그게 확실히 느껴진다.

 부모도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황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너무 힘들어서 등등 이유가 있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되는 거짓말 보다는 잘 설명 해 주는 것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기도 하고 덜 힘들기도 하다. 아이가 식당에서 뛰는 상황이라면 아이를 붙잡고 차분히 이유를 설명해 주면, 설명 해 주는 시간만큼은 아이가 조용히 있는다. 이것도 상황 해결이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는 자신에게 차분히 설명해 주는 부모를 보면서 부모로 부터 신뢰감과 존중감을 느낀다. 힘들어서 거짓을을 할 때는 짜증이나 화등의 감정이 따라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차분히 설명하다 보면 그런 소모적 감정은 대신 아이를 이해 시키기 위한 정돈된 마음과 감정이 생긴다. 역시 아이는 존중 받는 것이고, 부모도 차분해 지고. 일거양득, 일타쌍피, 개이득. 뭐 이정도.....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말고, 아이에게 차분히 정확히 설명하는 것, 아이 부모 모두에게 너무 좋다.



4. 약속 지키기

 

 이건 매번 어렵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이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아빠. 나 부채가 너무 필요해요.' ' 왜 필요한데?' '나 부채로 바람도 만들고, 나무도 자르고, 윙윙윙도 하고, 모기도 파리도 못 오게 해야해요.' '응 알았어. 오늘 집에 들어 올 때 부채 가지고 올께.' 지금은 새벽이라 아이는 부채를 가지고 윙윙윙 할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고 있을텐데.......

 아이들과 신뢰감을 쌓는데 이만한 건 없지 싶다. 아빠 엄마는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 이렇게 각인이 되어 있다. 아직은 서툴지만 아이들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아직 욕구가 이성을 쉽게 이기는 나이라 되고 생각만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약속이 중요한 건 안다.

 처음에 이 항목을 육아에 적용하느라고 엄청 고생했다. 애들 키우는 것 만으로도 종종 탈진인데, 약속까지......그런데 이번에는 우리가 진화했다.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 쪽으로, 물론 약속을 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 해 준다. 왜? 라는 질문이 수도 없이 날아오지만 그래도 설명한다. 이젠 아예 놀이같다.

 

 이 정도면 손님 대하기가 제대로 되는 걸까? 늘 의심하고, 자책하고, 이리쿵 저리쿵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웃음이 집 안을 가득 매우면, 소 떼처럼 뛰어가는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면, 적어도 틀린 방식은 아니구나 싶다.


 이게 뭐 대단하다고 글까지 쓰나 싶지만, 그리고 쓰고 나니 나는 잘했다 뭐 이런 식의 자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실은 나도 완벽하게 하는건 아닌데 ㅠ.ㅠ), 음...... 뭐랄까, 내가 적은 저 4개의 항목도 그렇고, 각자 나름의 번거롭지만 아이를 존중하는 태도에 반응 해 주는 아이들이 주는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기억에 남겨두고 했으면 해서다.

 나에게 온 두 아이는 존귀한 존재. 아이를 키우고 있는 모든 육아 인도 당연히 존귀한 존재. 그리고 이 지구 위에 모든 사람도 당연히 존귀한 존재.


 친애하는 여러분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

작가의 이전글 아가들과 책 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