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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ug 16. 2020

에세이의 단점


강의를 하기로 했다. 주제는 무려 에세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내 삶을 더 잘 풀어내는 법'이었는데, 에세이를 꾸준히 쓰고 있긴 하지만 막상 사람들 앞에 나서서 "아아, 에세이란 말이죠!"를 말하려니 세상에 없는 장르를 일컫는 기분이 들었다.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이는 느낌이었다.


수강생분들에게 수업료를 받는   아무리 멋진 척을 한대도 한계였다(개인 강의는 수강생이 모이지 않으리라는 예측도 한몫했다). 그래서 강의료는 서울시에서 받되 수강생분들은 무료로 들을  있는 청년 강사 공모전에 지원했다. 합격도 했고 강의 계획도 완성됐지만 정원 미달이 될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정원의 3 넘는 분들이 지원해주셨다.


아주 두근두근했다. 강의 공고에 내 브런치 주소를 담았기 때문이었다. 내 글을 읽고 반한 게 분명하다며 자만심에 휩싸였다. 글로 만난 나와 실제의 내게서 괴리감을 느끼면 어떡하지 걱정도 했는데,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수업을 들으러 오신 13명 중 내 글을 읽고 오신 분은 3명뿐이었기 때문이다……(반은 될 줄 알았는데……). 새삼 에세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환호받는지 알게 됐다. 근데 이미 알고 있어서 또 알고 싶지는 않다. 나의 구독자 분들이 보고 싶다…… 엉엉……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강의 날짜가 가까워오자 매니저님이 엑셀 파일을 보내주셨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사연이 적혀있었다. 왜 에세이 강의를 듣고 싶은지에 관한 이유들이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첫 문장이 떨어지지 않아서, 일상을 기록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는 말들이 진솔하게 쓰였다. 한줄한줄을 읽으며 부담감이 엄습했다. 마법사가 되어 이분들의 고민을 해결하면 좋겠건만, 내게 주어진 건 2회 차의 원데이 클래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책 몇 권을 냈고 글쓰기 강사로도 일했다는 신청자들은 과감히 뺐다. 그분들은 내가 없어도 글 쓰는 법을 알 테니까. 합격자를 가리는 과정에서 너무 초보자만을 원하는 건가 싶어 강사로 일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친구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자신을 뽐내기 위해 강의를 신청하는 수강생은 피하는 게 맞다고 했다. 자책감을 조금 내려놨다.


자기 치유 에세이라는 단어도 과감히 지웠다. 경험 상 치유라는 건 한두 번 만에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0회 차면 끝날 줄 알았던 심리상담도 종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책 한 권을 읽고 치유되거나 영화 한 편을 보고 치유되는 건 오래가지 못했다. '힐링'이나 '치유' 같은 혹할만한 어휘는 지우고 그 대신 '정제'를 담았다. 잔뜩 화난 채로 배설하는 글은 독자에게 피곤함을 가져다주어서다.


작가가 운다고 독자도 울 거라는 건 착각이라는 걸 안다. 감정을 오래오래 정리하고 최대한 담담하게 쓸 수록 하고 싶은 말을 잘 전할 수 있다. 나만 읽는 글을 쓰더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면 휘몰아치는 감정에서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심정으로 피피티를 만들었다.


강의를 꾸린다는 건 끊임없는 자문자답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었다. 나는 왜 에세이를 좋아했더라? 하면 내가 답을 해야 했고, 에세이를 쓸 때는 뭐가 중요하더라? 도 내가 답해야 했다. 피피티를 만드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홀로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힘을 쏟았다. 오랜 고민 끝에 실마리가 한둘씩 풀렸다. 나는 왜 에세이를 좋아했냐면……


사람은 위험한 상황이나 슬픈 감정에 직면하면 도망가고 싶기 마련인데, 에세이는 그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는 창구가 되어주어서였다.


에세이는 내가 왜 힘든지, 종일 재밌었는데 왜 갑자기 우울해진 건지 그 감정의 출발점을 짚는 기회를 준다. 냉장고 청소를 하지 않고 밖을 돌아다니던 내게 냉장고를 들여다볼 힘을 준다. 한 번 시작한 글은 결국 마무리를 필요로 하므로 반성하며 끝난다. 그 과정에서 지우고 싶은 사건에서도 이미 무엇 하나를 배웠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2020. 07. 31.)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 작가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글쓰기는 전체적으로 삶에 대한 기억력의 화질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깊이 동감했다. 일기가 그날의 사건을 곱씹어 적는 기록이듯 에세이는 최근 내게 있었던, 혹은 10년 전에 있었던 기억을 꺼내 적는 과정이므로 나 역시 에세이를 쓸 때마다 기억력이 진화되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큰따옴표(")를 쓰는 일은 나의 대사는 물론 타인의 대사들도 복기해야 가능한 일이고(그래서 큰따옴표를 많이 쓰는 에세이스트들이 부럽다), 기억은 상황 전체를 영상으로 찍지 않는 이상 다시 돌아갈 수 없으므로 24시간 자동 녹화 기능을 켜는 것과 가깝다. 에세이는 삶을 한 편의 포트폴리오로 만드는 작업과도 같다.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건, 그리고 피하고 싶은 감정을 맞닥뜨릴 힘을 키운다는 건 에세이의 큰 장점이나 반대로 말하면 단점이기도 하다. 에세이를 쓰며 잔뜩 키워버린 기억력 탓에 지나칠 수 있는 감정과 상황도 오롯이 기억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별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복기하고 싶지 않은 울적한 기억들이 쉽게 되살아난다. 미련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을 첫 강의에서부터 할 수는 없으니 돌아오는 마지막 시간에 조심스레 얘기할 계획이다.


에세이스트로 살겠다는 건 미련 덩어리가 되겠다는 일과 같습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도 쉽게 잊히지 않고 흘려보내고 싶은 일들도 끊임없이 곱씹게 만들거든요.


라고.

그러나 뒤에 이 말을 덧붙일 것이다. 이런 단점을 덮을만한 장점도 충분히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에세이를 쓰는 거겠지요.


단순히 성공을 위해 에세이를 고른 거라면 단점의 크기에 억눌려 상처를 재생시키다가 힘에 부쳐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29CM의 이유미 카피라이터는 "글을 읽는 첫 번째 독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돼요"라고 했다. 글을 읽는 첫 독자는 무엇보다도 나다. 오늘도 나를 다치게 하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다.





글에 관한 얘기는 이쯤, 이제 다시 미련 덩어리로 돌아갈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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