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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ug 01. 2022

에세이는 어떻게 씁니까


간밤에는 브라우니를 먹는 꿈을 꿨다. 일어나자마자 입이 심심해 빵집에 들러 브라우니를 샀다. 집에 도착해서는 라테와 함께 입 안으로 천천히 녹여 먹었다. 향긋한 초코의 달달함과 라테의 고소함을 맛보며 8월의 시작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브라우니를 아껴 먹으면서 인터넷 서점을 구경했다. 아침마다 신간 에세이를 살펴보는 게 취미이므로 신상품을 누르고 에세이 카테고리에 들어가 어떤 책이 나왔는지 살펴봤다. 이 책은 표지가 시선을 당기고, 이 책은 제목을 잘 지었고, 그런 생각을 하자 어제 진지하게 했던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에세이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거야, 하는 고민. 에세이 작법서는 모두 읽었고 종종 에세이 강의를 하기도 하는 나지만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낯설어 보이는 상황. 그래서 어제는 어깨에 힘을 딱, 주고 이런 글을 적었더랬다.


  언제나 글에 관해 아는 게 없다는 느낌을 품고 있지만 누군가 질문을 하면 큰 고민 없이 입을 여는 나를 보며 그래도 이제까지 배운 게 헛되지는 않구나 싶다. 문예창작 과정을 끝냈지만 수필은 과정에 편성되지 않았을뿐더러 스스로 열 권 남짓 되는 에세이 작법서를 찾으며 독학했기에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충돌하는 지점이 생긴다.

  어떤 작가는 나라는 범주를 넘어서 타인에게 편지를 부치는 심정으로 세계를 넓히라 했고, 어느 작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닿으라 했다. 정답만 찾으며 암기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에세이는 공부하면 할수록 답이 없다. 에세이 작법서는 늘어나지만 마음 한쪽이 언제나 불편하다. 규칙이라 여긴 모든 법칙이 실은 한 작가의 주관적인 이야기에 머물 뿐, 아무리 존경하는 작가여도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완벽한 답은 내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내심 안도가 되다가도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시중에 있는 에세이 작법서는 물론 수필과 산문 작법서까지 모두 섭렵했다. 쉽사리 지나칠 뻔한 일상에서의 소재를 붙잡는 법과 마음을 글로 풀어내는 법과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 골고루 쓰라는 말을 기억한다. 그러나 작법서는 과외가 아니다. 내가 지닌 특유의 문체가 어떤 식으로 공부하면 더 발휘될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은 책에 대고 묻기 어렵다. 


브라우니를 사 먹었다는 첫 문단과 비교하면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글은 어려운 생각이더래도 최대한 쉽게 쓰이는 게 좋다는 생각을 품지만 어제는 앞으로 영영 수필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혀 이렇게 썼다. 그저 두 눈에 힘 풀고 말랑말랑해진 손가락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적으면 되는데, 유려하고 수려하게 적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평소 잘 내보이지 않는 분위기로 글을 썼다. 이정림 작가는 저서 <수필 쓰기>에 수필을 "향기가 있되 진하지 않고, 소리가 있되 요란하지 않으며, 아름다움이 있되 천박하지 않은 글, 이것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누군가 내게 수필이나 에세이가 무엇인지 물으면 나는 "그냥 쓰는 것"이라 답하고 싶다. 인용은 최대한 배제하고, 유행어는 되도록 쓰지 않으며, 첫 문장을 시작하기 어려우면 큰 따옴표를 써서 대사로 맛깔나게 시작하라는 강의는 이제 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실전으로 돌입한다. 정제되고 정돈한 글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날 것 그대로의 팔딱팔딱 뛰는 글이 더 읽기 매력적인 에세이라고 생각해서다.


언젠가 한 강의에서 수강생이 "선생님, 수필과 에세이의 차이는 뭐예요?"라고 물었는데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필은 조금 더 정제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글이라면, 에세이는 내 마음에 집중하는 글이 아닐까요,라고 답했지만 돌아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나는 영원히 수필가는 되지 못하고 에세이스트로 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에서 나를 수필가로 인정하고 연희문학창작촌의 자리를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시인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수필가라는 이름을 당당히 들고 집필실에서 아, 간밤에는 브라우니를 먹는 꿈을 꿨다,라고 적는 나를 보면 수필가라고 해서 어려운 한자어를 엮고 내 마음보다 사회를 통탄하고 비판하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수필의 종류로는 경수필과 중수필과 서사 수필과 서간 수필처럼 다양한 성격이 있지만 나는 그 정의를 사전을 보지 않고서는 답할 수 없다. 이론이 많아질수록 실전이 어려워져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냥 당근 마켓에 물건을 팔았고 프린터를 사겠다는 사람이 약속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 그 사람을 차단해버렸다는 글을 인류애적 관점으로 우리는 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으며 상대방의 시간을 존중하지 않고 무례한 사람은 이토록 많은가의 범주까지 접근해버리면 머리가 아프다. 그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이었던 거다. 사기는 싫지만 물건에 관심이 많아 찔러보기에 도가 튼 사람일 수 있고 약속 시간에 급한 일이 생긴 나머지 오늘은 어렵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미안함에 도망친 사람일 수 있다. 한 사람의 개별적 특성을 전 세상을 아우르는 사람이라고 해석해버리면, 그러니까, 머리가 아프다.


스스로를 에세이스트라고 말하고 다니니 에세이를 쓰고 싶은 사람들이 내게 자주 에세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한다. 그저 쓴다고 말하면 강의료에 보답하는 게 아니어서 감동이나 재미나 일상에서 얻은 작은 교훈 같은 걸 가미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냥 쓰면 된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인간관계의 철칙이 이렇게 바뀐 건 어떤 친구를 만나서 바뀐 건지 되도록 솔직하게 쓰면 된다. 그러면 솔직하게는 어떻게 쓰는 거냐고, 감추고 싶은 문제까지 보여야 하는 거냐는 질문이 뒤따라올지 모른다. 감추고 싶은 건 감추면 된다. 상처를 소화할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치유하겠다고 아픈 곳을 내보이면 글쓰기에 관해서는 더 아프다. 나중에 이불을 헤지도록 차며 후회할지 모른다. 이 글의 주소를 복사하면 알겠지만 발행한 글보다 저장해둔 글이 더 많다. 내가 발행한 이야기로 누군가 왜곡해서 해석할지라도 반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초연해질 때 그때 올리려고 묵혀둔 글이다.


산문과 수필과 에세이는 미묘하게 다르다고들 하지만 그 차이를 좀처럼 모르는 나로서는 우선 손 가는 대로 쓴다. 여기까지 쓰면 손 가는 대로 쓰는 건 어떻게 쓰는 거냐는 질문이 오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브라우니 꿈을 꿨고 브라우니를 라테와 함께 사서 먹었으며 왜 그 이야기를 일기가 아니라 모두 볼 수 있는 공간에서 내보이고 싶은지를 고민하면 될 문제다. 나 같은 경우는 '에세이란 어려운 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쓰는 장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브라우니 얘기를 꺼냈고, 당신에게는 브라우니를 싫어했는데 오늘따라 브라우니가 먹고 싶은 나를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라 정의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허상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세이가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물음이 들 때 좋아하는 에세이스트의 일회성 강의에 참여했다. 무언가 대단한 비법을 바라고 들었지만 선생님은 손에 힘을 풀고 쓰고 너무 어렵게 쓰지 말라는 말씀만 되풀이했다. 나는 그것보다 더욱 대단한, 그러니까 짧은 시간에 필력을 늘리는 법과 단어를 적재적소에 다채롭게 쓰는 법과 생판 모르는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고 나를 따로 불러 얘기했다. 책 많이 읽고, 강의는 듣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그 말을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한다. 책을 많이 읽고, 손과 눈에 힘을 풀고, 그냥 쓰는 것. 모두가 한 편의 에세이를 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곪은 채 앓지 말고, 아픈 얘기를 꺼내면 누군가 나를 동정하거나 손가락질할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볍게 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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