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꼬박 새웠다
문예창작생의 꿈은 등단이다. 그리고 나는 올해 등단을 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장르인 '동화'로 말이다. 하지만 등단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다. 비등단자의 책이 더 많이 읽히는 것도, 등단하고 반짝 사라지는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것도. 또한 꼭 등단을 하지 않더라도 대중들에게 글을 보일 수 있는 방법도 많았다.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기도 했다.
브런치는 지금 내가 쓴 한 편의 글이 심사위원의 평을 거치지 않고 재깍 전해질 수 있는 통로다. 한편을 쓸 때마다 심사위원의 검토를 받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발행 버튼을 누르면 직접적으로 그 글에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는 분들 덕분에 자존감이 쉬이 올라갈 수도 있는 기쁨도 생긴다.
작년 말, 「심리상담만 3년을 받았던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심리 상담이 종결되고 스스로 내 선택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때 담담히 적었던 얘기였다. 한 명의 독자만 읽어도 뿌듯하겠다고 쓴 그 글은 다음날 카카오톡과 다음 메인에 올랐다. 조회수가 금세 2만을 넘었고 구독자가 30명을 돌파했다. 그 덕분에 더욱 많은 독자분들이 내 글을 찾았다. '작가에게 제안' 버튼을 눌러 편지를 쓴 독자님도 계셨다. 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브런치에 악플이 달리는 작가분들도 간혹 계셨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한 번도 악플이 달린 적 없었다. 웹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나를 응원해줬다. 독자님들은 재밌다고, 감명 깊게 읽었다고, 힘이 되었다는 진심 어린 말을 놓고 가주셨다. 아동 문학 문예지에 작품이 실렸다는 소식을 들고 왔을 때도 많은 분들이 나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다.
그래서였나. 몇 년 만에 받은 악플은 나를 잘게 잘게 부숴버렸다. 게다가 한 개의 악플도 아니었다. 심지어 책 뒤편에 달린 글이었다. 댓글을 숨기거나 창을 꺼도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답은 지면을 찢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단행본은 아니더라도 실명이 실린 나의 첫 책이다.
내 작품이 실린 문예지는 따로 심사평이 없었다. 트렌디하게 카톡 오픈 채팅방을 활용해 4시간가량 익명의 독자들이 작품을 미리 읽고 얘기하는 식이었다. 맞는 말도 있었고, 틀린 말도 있었다. 인터넷 상이라면 일일이 답글을 달고 메일이라도 보내 볼 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저 덜덜 떨리는 손을 꼭 붙잡고 한줄한줄을 눈에 담았다.
"내가 생각하는 동화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것 같다."
"불친절하다. 성장과 해결의 실마리를 독자에게 넘겼다."
"이혼 가정에서 도벽이 생긴 아이가 나왔다는 건, 정상 가족에서는 그렇지 않냐는 작가의 시선이 우려스럽다."
"친구를 부를 때 성을 붙여 얘기하는 데,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혼내는 결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워낙 많이 읽어서 따로 책을 펴지 않아도 악플들을 모두 쓸 수 있다. 엉엉.)
결론만 말하면 전부 아니다. 이혼 가정이 아닌 친구가 부모님의 폭력을 털어놓는 장면도 있고, 결말에서의 선생님의 행동은 아이들을 혼낼 마음이 추호도 없다. 모든 동화가 해피엔딩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상이 학원과 유튜브로 채워진 아이들이 겪지 못한 상황에 간접적으로 처하면서 만약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의도로 결말을 지었다. 열린 결말은 무척이나 싫어하는 나이므로 주인공의 마음이 변해가는 문장들도 넣었다. 내내 친구를 김다솜이라 부르던 주인공이 끝에 와서 다솜이라고 처음 말하는 장면들이거나.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 펜을 꺼내 책 아래에 일일이 답글을 달았지만 애석하게도 전해질 방법은 없다. 전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안다. 사실 이런 의도로 썼어요,라고 말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수업시간 합평을 할 때에도 작가의 말이 '작가의 변'으로, 합평이 끝난 맨 뒤 순서로 배치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작가는 작품에 드러내야 한다. 작가가 어떤 목적으로 썼건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무용하다.
안다. 알어. 아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는 일뿐이었다. 오랜만에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 끙끙 앓다가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친구들은 당연하게도 내 편을 들어줬지만 그럼에도 내 동화에 평을 써주었던 분들의 시선이 고와지는 건 아니므로 닭똥 같은 눈물만 꺼이꺼이 내보냈다.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넘어 욱신거렸다. 내가 과연 동화에 소질이 있는 건지 그런 물음까지 들자 문예지 담당자분에게 메일을 보냈다. 심사평을 알려주었으면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러나 답장은,
이전에는 심사자 선생님들께 작품을 보내 심사평을 받고 추천을 진행했습니다만, 자유 투고로 바뀌며 기성 작가들도 응모를 하는 시스템으로 변경되어 심사평을 게재하고 심사자를 두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였다. 맞다. 등단작을 뽑는 심사위원들이 무엇이 중요하냐! 독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라고 대학 시절 내내 말했던 나지만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정작 내 차례가 오니 평론가 분들의 평이 궁금해졌던 거다. 미천한 저를 뽑아주신 이유가 하나는 있을 터이니 …… 그중에 칭찬은 한 줄이라도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 껄껄 … 이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심사자보다 독자분들의 의견에 중점을 맞췄다는 답변이 오자 숙연해졌다.
그래도 하나의 변론만은 꼭 하고 싶다. (와우, 정말 구질구질한 나란 녀석!) 주인공의 성장이 보이지 않으므로, 즐겁게 끝나는 해피엔딩이 아니므로 '내가 생각하는 동화'가 아니라고 했던 분에게…….
동화가, 지금의 이야기가 어린이에게 해줄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울지 마라. 이런 일은 어디나 있는 거란다. 그것을 잘 알았으니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현 동화 작가님, 『동화 쓰는 법』
악플들이 달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찝찝한 동화를 계속 써보려 한다.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한 동화는 다른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 세상이 하하호호하게 보이는 동화만 읽다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사회에 나갔을 때 처음 겪는 갈등에 너무도 크게 휘청거리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 이런 위기는 요아 작가님 책에서 간접 경험 했었어. 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한 명만 있더라도 내 인생은 자랑스러워 질 것이다.
울지 마라. 이런 일은 어디나 있는 거란다. 그것을 잘 알았으니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