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Dec 08. 2021

에세이도 어렵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에세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넘겨짚는 사람을 만났을 때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오프라인에서 글을 쓴다 밝히면 "우와, 작가네, 어떤 글을 쓰세요?"라는 관심을 받는다. 에세이라 답하면 분위기는 역전이다. 당당하게 "아, 저는 에세이는 안 읽어서."라 말하거나 책 좀 읽는다던 사람들은 대뜸 "소설인 줄 알았는데…… 등단했다거나."로 아쉬움을 내비친다. 처음에는 발끈한 나머지 동화로 등단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단편 하나 올라간 것뿐이고 계간지는 삼십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상금을 주고 영영 연락이 없었다. 편집자에게 러브콜이 쏟아지거나 당장 동화책을 내자고 제안받는 것도 아니니 입을 다물었다. 등단했다고 말해봤자 백발백중 동화책을 냈냐는 물음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쓰기 쉬운 장르라 여기는 흐름은 대학의 문예창작과 시절에서부터였다. 학과는 여러 분과가 나뉘어 있었는데, 소설과 시와 희곡과 비평뿐이었다. 웹소설이나 에세이는 그들이 여기는 문학 축에 들지 않았고,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곳이 연극이어서 희곡 분과에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소설과 시가 아니라며 차별을 받았다. 지원비가 열악했다. 연극을 올리려면 판 표값을 모두 합친 데다가 사비를 내야 했다. 교수님의 대부분이 소설가와 시인이었으므로 소설과 시를 쓰는 아이들은 공개적으로 예쁨을 받았다. 이렇게만 말하면 먼 옛날 같은데 졸업한 지 2년이 채 안되었으므로 꽤나 따끈따끈한 정보다.


이십 대 초반에는 인정받겠다고 소설에만 매진했다. 단편 소설만 여덟 개를 썼다. 그보다 짧은 초단편 소설은 말할 것도 없이 더 많다. 칭찬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칼럼이나 비평을 낼 때의 칭찬보다 훨씬 덜했다. 내가 쓴 소설은 자전적 일기 같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선배가 비웃음을 보이며 차라리 에세이를 써, 라고 말해서 두고 봐라, 무시받지 않을 훌륭한 에세이를 쓰고 말 테니까, 하며 팔을 걷어붙인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추워서 소매까지 내렸지만.


최근에 책을 한 권 썼다는 게 주변인들에게 밝혀지며 에세이라고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을 만났는데, "에세이가 뭐 어때서! 쉬운 줄 아나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에세이를 쓴 뒤로 들은 얘기만 잠깐 떠올렸는데 이렇다. 일기잖아요, 그냥 내 얘기 쓰면 되잖아요, 인생에 답 있는 척 말하는 게 너무 오글거려요, 넌 다 할 수 있을 거야, 뭐든지 괜찮아요, 이런 흔한 말 써놓고 에세이라 이름 붙이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 면전 앞에서 그런 말을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실제로 다 들은 말이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술자리가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강도는 점점 세져서 예에, 예에,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하고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좋아하는 에세이를 추천해봤자 그들은 읽을 것 같지 않고, 내 에세이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였다. 그리고,


한때는 나도 에세이가 부끄럽던 적이 있어서였다.


부끄러웠다. 귀여운 캐릭터를 앞에 세워두고 당신은 무엇이든지 헤쳐나갈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주문을 외우는 책들을 보면 유명하지 않아서, 학생이라서, 등단하지 않아서 지면에 오르지 못한 친구들의 글이 생각나 미웠다. 인스타그램에 그믐달 사진 몇 장 올려놓고 오늘도 날이 참 밝네요, 하고 좋아요를 받는 인플루언서를 싫어했다. 그때부터 에세이를 쓰면 최대한 긴 문장을 엮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게 아니란 걸 안다. 괜찮아요, 잘했어요, 좋아해요, 라는 말을 듣기 어려운 시기다. 칭찬보다 비난이, 응원보다 비판이 듣기 쉬워서 따스한 글 한 줄이 누군가에게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조용히 잠에 들 수 있을 편안한 밤을 선사할 수 있음을 안다.


오전에는 괜찮았다가 오후에는 안 괜찮은 때가 많은 나인지라 사연 없이 괜찮아요, 잘할 수 있어요, 라는 말은 아직 못 하지만 이제는 그런 에세이를 보며 불평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 괜찮다고 말하는 에세이는 별로 없다. 캐릭터를 앞세웠더라도 자신의 힘들고 지질한 시기의 한 순간을 타래처럼 보인 뒤 쓴 기록일 테다. 타인에게 힘을 건넨다는 건 내면에 용기와 응원을 건넬 힘이 채워져서라 생각한다. 거짓말을 해도 탈이 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슬픈 상황에서 나는 다 견뎌냈다는 거짓말을 칠 수 있겠지만, 세상을 계산적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아서 에세이 작가는 진정 상대에게 건넬 힘을 비축한 뒤 페이지를 열었다고 믿는다. "에세이 그거 쉬운 거 아니에요?" 라 말하는 사람을 또 만난다면 "아뇨, 어렵던데요, 써보셨어요?" 라고 되물어볼까……. 너무 싸우자는 얘긴가…….


에세이는 자격 없이 누구나   있는 분야여서 그런지 유독 무시받는  같은데, 이제는 그런 얘기 앞에서 얼굴 그만 붉혀야겠다. 에세이는 어렵다. 나와 가장 친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아채야 한다.  기분이 나빴는지,  기분이 좋았는지, 그때로 돌아가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나의 욕구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나와 친해진다는  굉장히 번거롭고 힘들어서 사람들은 질문을 밖으로 보낸다. 게다가 에세이는 일기가 아니어서 독자를 상정해 앞에 두고 편지를 건네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부친다는  굉장히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니 에세이를 무시하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그거 , 일기장 묶어서 쓰는  아냐?  킬킬대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과 희곡과 웹소설과 동화를  써봤다. 에세이는 그만큼이나 어렵다. 단순히 어려우니까 무시하지 말라는  아니라, 직접 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 쉽겠지 말하는 쉬운 판단은 접어두는  훗날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방안이다. 나는 에세이를 쓰며 비로소 에세이를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소개글에는 동화를 쓴다 밝혔지만, 에세이를 향한 사랑이 끝없이 깊어지는 나로서 곧 문장을 바꿔야 하나 싶다. 나는 에세이를 쓴다. 누가 뭐래도 에세이스트고 그런 내가 좋다. 당신을 헤아리고 내 경험과 생각을 선뜻 말하는 분야가 좋다. 모두 사소한 얘기까지 들어주는 당신이 있어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단하다. 누가 뭐래도.



표지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Portrait of an Artist, 197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