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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02. 2022

튕겨나가는
어떤 부탁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 않지만, 나는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엇이든 부탁할 수 있다. 물론 모르는 사이라는 가정이 붙어야 한다. 가까운 사이에 부탁해야 한다면 상대보다 더 진땀을 흘린다. 그게 미안해서 상대는 부탁을 듣기 전에 이미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뭔데! 뭔데!"하고 물음표를 연발한다. 쓰고 보니 그게 내 능력인가 싶은데…….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모르는 사이에 부탁하는 건 편하다. 내게는 미소를 금세 장착한 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끝을 쉽게 늘리는 능력이 있다. 쓰고 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능력인 것 같아 작아지는데……. 다시 꼿꼿하게 일어나서 할 말을 이어나가자면, 그래서 나와 조금 먼 관계의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나를 할 말 다 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요아 씨는 똑똑하게 요구하는 사람이야. 일을 맡기면 안심해도 된다니까.


  부탁을 받는 입장보다 하는 입장이 익숙한 내게 팁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별 거 없다. 미사여구다. 미사여구를 붙이면 분위기가 더욱 폭신해진다. 죄송하지만, 실례지만, 당연히 거절하셔도 되지만 조심스레 부탁드리자면, 호옥시, 바쁘시겠지만, 고생 많으십니다……. 그러면 상대는 무슨 부탁인지 궁금해하며 귀를 연다. 특히 인기 많은 식당 예약을 하거나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어 문의할 때 고생 많으십니다, 를 붙이면 언제 날카롭게 여보세요! 를 했냐는 듯 다정한 말투로 나를 반긴다. 다 엄마에게 배운 사회생활이다. 엄마는 수금이 늦어지는 아빠의 거래처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숙이지 않으면서 떳떳하게 돈을 달라 말하곤 했다. 즉 나는 유치원 시절부터 생계형이자 생존형인 목소리와 어투를 건너 배운 거다. 엄마가 수화기를 잡을 때마다 놀아달라며 방해하던 나는 엄마의 말투를 따라 하며 인정받는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처음으로 부탁을 실패했다. 그냥 거절도 아니고 장렬한 실패다.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무런 제지를 안 하시는 자원봉사 선생님을 보고, 그저 아이들을 관심 있게 지켜봐 달라며 다정하게 부탁한 것뿐이었다. 내 부탁을 들은 자원봉사 선생님은 화가 나서 고요한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보든 말든 언성을 높이셨다. 무척 당황한 나는 눈이 커졌고 말을 또렷하게 하는 대신 어어어…….로 늘리고 싶지 않은 말끝을 늘렸다. 연세가 있으신 분이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은 "여기서 몇십 년을 일했는데 그걸 모르겠어욧?"라며 화를 내셨다. 역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중립으로 돌아와서 화라고까지만 적어야겠다. 아니, 그러면, 왜 작품을 만지는 아이들을 가만히 두고 보신 거예욧? 하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른에게 대들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배우며 모범생의 신분으로 자라온 나는 예에, 예에, 조금만 목소리를……. 으로 까지만 답했다. 그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었나 찔렸으니 할 말 다 했다.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되고 점심시간이 왔다. 풀 죽은 나는 굶겠다며 카페에 홀로 들어서 머리가 띵해질 만큼 차가운 라떼를 마셨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눈앞에 자꾸 그 상황이 펼쳐졌다. 제가, 여기서, 몇십 년을, 일했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어욧? 아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그 말씀을 하게 만든 나의 발화를 짚어봐야 한다. 호옥시, 전달받으신 것 있으실까요오, 아이들이이, 작품으을, 만지지 않게, 살펴주시면……. 아무리 생각해도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도록 친절하게 말한 것 같은데 선생님은 꼭 관람객이 이쪽을 쳐다보게끔 소리를 지르셔야 했을까. 새해라 나이를 한 살 더 먹긴 했지만 하루 만에 성숙해지지 못한 나는 결국 상사분께 조언을 구했다. 자원봉사 선생님이 안내를 해주지 않으셔서 부탁드렸는데 조금 날카롭게 반응하셔서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입만 웃는 이모티콘을 달았다.


  상사분은 제가 말씀드려 볼게요, 하고 사라지셨고 나는 아이고, 큰일이 났네, 괜히 말했구나! 하며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덕담을 주고받느라 바쁜 새해에 얼굴이 붉어지는 사건은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나는 키보드를 치며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를 돌렸다. 드라마 작가가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상사분은 다시 오셔서 "괜찮으셨는데요?"라고 말씀하셨다. 상사분의 말에 따른 선생님은 제지해야 할 상황을 잘 포착하시고 의자에 앉지 않으시며 일에 열중이셨다. 순간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았다. 상사분은 당혹스러워하는 내 표정에서 심리를 읽으시고 "요아 씨가 좀 어려 보여서 그런 것 같아요."라고 덧붙이셨다. 실은 내 안의 내가 이미 고래고래 소리치던 심증이었다. 어려서 그래! 어려서 무시당하는 거야! 안 어렸으면 화도 안 내셨을 거야! 그런데 내가 말하지 않고 상사분이 먼저 그 말씀을 해주셔서 가설에 약간의 심증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본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핸드폰에 열중이신 분이었으므로.


  자격지심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하기에는 경력이 낮고 나이도 어린 편에 속해서 무시를 좀 많이 당한 기억이 있다. 심지어 말을 늘리고 여러 첨언을 덧붙이는 부탁 전용 말투가 상대로 하여금 나를 더 만만하게 볼 여지를 주기도 한다. 상사분은 장난스럽게 "나이를 더 먹어야 해!"라고 하신 뒤 "요아 씨 잘못 아닌 거 알죠?"라고 위로해 주셨다. 장장 한 시간 넘게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자책하던 참에 들은 그 말은 나를 기억 밖으로 놓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무작정 본론부터 소리치는 상대보다 "고생 많으십니다." 라거나 "수고하십니다. 무엇 좀 여쭤보기 위해 전화드렸는데요."라고 살펴주시는 분에게 마음이 간다. 불가피하게 거절한대도 다음에는 꼭 수락할 수 있도록 이름을 기억해둔다. 따뜻한 말의 위력을 알고 있어서다. 물론 따뜻하게 말했는데 이렇게 튕겨나갈 때가 있겠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첫 만남에 "작품 만지는 아이들 좀 제지해주세요."라고 본론이라는 카드를 바로 꺼내고 싶지 않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이왕이면 따뜻한 말을 고를 거다. 수식을 조금 붙였다고 만만하게 보이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아, 괜히 굶었다.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했다. 그래야 그 힘으로 또 다정한 부탁을 건네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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