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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04. 2022

새해맞이 가짜 계획


새해가 되니 이곳저곳에서 계획을 묻는다. 어색한 사이에 신년 계획을 주고받는다는 건 심심한 평일에 날씨를 묻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은 나는 매일 좋거나 맑다고를 연발할 수 없어 마땅히 없지만 있다고 답했다. 겉으로는 근사한 베스트셀러를 내겠다고 자신 있게 소리쳤으나 진짜 내 계획은 실명과 이름을 걸고 이야기를 밝히는 일을 여름 이후로 전부 다 그만둬버려야겠다고 결심하던 참이었다. 악플 때문이냐 하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책을 못 썼다고 넘기면 그만인데, 무례한 이야기를 듣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특히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오는 메시지에서 많이 느꼈다. 내가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을 합쳐도 이천 명의 구독자님이 계신 것뿐인데, 많다는 건 알지만 수에 비해 왜 이렇게 무례한 메시지가 많은지 알 수 없었다. 인플루언서의 삶을 상상하다 내려두었다. 다정함을 눌러 보낸 디엠을 인플루언서 분들이 절대 읽지 않는 이유를 드디어 알았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 답장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의 메시지가 괜찮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나조차 나를 알 수 없을 만큼 입체적인 나를, 글 하나 읽고 제멋대로 납작하게 판단한 뒤 이러실 것 같아요 저러실 것 같아요, 확신하는 모양이 답답해 화를 내고 싶었다. 다만 내 글을 읽은 사람에게 성을 내고 싶지는 않아 우물쭈물 대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얼굴과 이름을 내보였고 상대는 그렇지 않으므로 누군가 타격을 입는다면 그건 나일 것 같았다. 글을 쓰는 방법과 사적인 고민을 다룬 긴 도움 요청 메시지에 더 기다란 답신을 보내봤자 감사합니다, 라는 다섯 글자도 돌아오지 않는 일이 쌓이기 시작하니 무력해졌다. 도대체 나는 왜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는 의도로 글을 쓰는지 아리송해졌다. 힘을 줄수록 무례한 사람들은 그 힘을 더 달라며 앗아갔다. 나는 진이 빠지고 말았다. 인간은 긍정적인 상황보다 부정적인 상황을 더 오래 기억한다. 다정한 메시지가 열 배 이상 많겠지만 마음이 상하는 메시지가 뇌리에 남는다.


파일럿이나 액티비티 강사의 삶을 시작하는 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계획을 세우기 전에 우선 청소를 하자며 집 안의 물건을 모두 내다 팔았다. 산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닌텐도와 피아노와 이북리더기를 넘겼다. 돈이 차곡차곡 모이니 이대로 쓰지 않는 모든 물건을 팔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무소유의 길까지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다 팔고 나니 책상과 모니터와 침대만 남았다. 방을 비워내자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그토록 원하던 간소한 하루를 올해에는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물건은 절대 사지 않겠다고, 무언가를 가지고 싶은 욕구가 들어도 빌려 쓰겠다고 다짐하던 찰나에 눈이 간 건 다름 아닌 키보드였다. 무접점 키보드. 힘을 주어 누르지 않아도 글이 써지는, 보글보글 소리만 들어도 아늑해지는 무접점 키보드가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글을 곧 그만둘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기는커녕 위로를 받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내가 보기 싫어 산문을 쓰는 일은 멈추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이십만 원을 호가하는 키보드에 눈이 간다는 사실이 말이 되지 않았다. 인과관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흐름이었다.


처음에는 비싼 키보드를 써본 적이 없으니 이내 그칠 호기심이라 여겼지만 단순한 궁금증이라 설명하기에 아침부터 밤까지 적축과 갈축의 차이점과 기계식 키보드와 무접점 키보드와 다채로운 레트로 키캡을 찾았다. 키보드를 사십 분 동안 치는 밋밋한 영상을 반복해 챙겨봤다. 라디오를 들을 때도 요동치던 마음의 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잔잔해졌다. 가지고 싶었다. 무접점 키보드에 손을 얹어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빠르게 타자를 치면 없던 생각도 샘솟으리라는 기이한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지 않을 사람이잖아. 두 번째 책이 나오면 그 이후에는 안 쓰겠다며, 무슨 말하는 거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짚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어떤 글을 읽고 나를 그때의 모습이라 확신했지? 사람은 매 시각 변하는데?


빠르고 쉽고 간편하게 정의당하는 사례가 생길수록 나도 나를 동일한 방식으로 인식했다. 저는 요아 님처럼 거의 매일 우울해요, 잠깐, 저는 거의 매일 우울하다고 한 적이 없어요, 있어도 그건 아주 예전이에요, 설명하고 싶지만 거기서 그런 말은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면 넣어두어야 했다. 밝은 글을 올리면 오늘은 너무 재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 분위기를 또 깨고 싶어졌다. 아니요, 저는 사실 재미있고 싶지만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저녁만 되면 울적해진 채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무한 반복해 들어요. 그런데 매일 저녁은 아니에요. 사람을 만나기 싫을 때가 있지만 동이 트기 전에 누군가와 간절히 통화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당신은 아닌가요? 매일이 같나요? 고민을 듣던 친구가 말했다. 울적한 면과 행복한 면을 나누지 마. 그게 답이었다. 그게 답인데 나는 왜 자꾸 나를 정의하고 싶어 했다. 나를 정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에세이를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무례한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거였다. 얼른 키보드를 받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이곳저곳에 생각을 표하고 싶었으니. 내게 닥친 불행과 행복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싶었다. 과정에서 후배들이 걷지 않아도 될 길을 걷지 않게끔 만들고 싶었다. 척박한 생각은 내가 지녀왔으니 너는 되도록 이 생각 쪽으로 걷지 마. 걷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니라 글로 인생을 표현하고 싶다. 티키타카가 가능한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닫으면 그만큼 다정한 메시지를 받지 못해 잠시 속상하겠지만,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을 때에도 다정한 사람들은 제안하기를 통해 편지를 보냈다. 댓글을 달았다. 바로 답장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고 쓰는 중이라는 표시도 안 떠서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답을 쓸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씀에도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다.


이쯤 오면 이게 무슨 글인가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에세이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깡그리 사라졌다는 말씀. 베스트셀러를 내겠다는 가짜 계획이 진짜 계획으로 바뀌었다는 말씀. 주문한 무접점 키보드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마음이 잡혔다. 키보드를 눌렀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아도 기분이 엉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의 정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를 멋대로 정의하는 사람은 내 팬을 안 한대도 괜찮다. 방향을 잃은 발자국이 자리를 틀었다. 좋아하는 사람만 나를 좋아하면 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과 조금 다른 상황이라 힘들었다. 연락한 사람은 애정이 있어 메시지를 보낸 것이기 때문에. 다만 뒤틀린 애정은 진심 어린 애정이 아님을. 당신의 주변에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당신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고 나무라나요. 당신의 이 모습은 싫고 저 모습은 좋다며 편을 가르나요. 그 애정은 과연 진짜 애정에서 비롯된 말인가요.


나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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