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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09. 2022

괜찮지 않은 게 아니고

忌日


넌 어때.

괜찮은데 괜찮지 않다고 말한 적 있어?


평소와 다르게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었어. 평소라 하면, 지난 한 달 동안. 일월은 대체로 설레는 때잖아. 계획을 시작하기 좋고 실행하기 좋고. 숫자에 있어 일이라 하면 시작하는 느낌이 나고. 그런데 나는 일월이 두렵다. 특히 올해의 일월은 더욱. 동생의 생일과 기일이 모여있는 달이거든. 모여있다고 말하니까 왠지 이상하다. 모여있다는 말은 밝은 느낌을 주니까. 행운이 모여있고 사람이 모여있고 사랑이 모이는 것처럼.


동생은 첫 번째 책이 나오기 전에 떠났어.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가끔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 걔가 내 책을 읽었다면 일 년은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어디선가 들었는데 사람은 신이 아니래. 죽음을 완전한 선택지로 고른 사람은 산 사람이 말릴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서 아무리 훌륭한 말과 행동을 취해도 그 사람은 결국 떠난다는 거야. 그래, 백 번 말해 그 말이 맞다고 하자. 아니면 남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 말이 만들어졌다고 하자. 심리 부검을 해봤는데 떠날 사람은 떠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하자. 있잖아. 그래도 미룰 수는 있지 않을까? 간혹 우리는 비행기표보다 비싼 수수료를 물고서 일정을 변경하잖아. 취소는 못하더라도 날짜를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어. 더 미루고, 미뤄서, 스물넷까지만이라도. 내 책이 동생에게 그런 힘을 주지는 않을까 싶었어. 책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언니의 말이니까. 걔는 내 말이면 다 믿거든.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바쁘게 지내면 잊을 수 있대서 바쁘게 지냈다. 글도 많이 쓰고. 마음을 덮지 않고 꺼내보이니까 나아지는 면이 생기더라. 편안하지 않은 날을 버티니까 편안한 날이 오더라. 견디고 버텨서 오랜만에 괜찮은 낮이 왔는데 동료가 묻는 거야.


"힘이 없어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거기서 뭐라고 답했게? 괜찮다고 안 했다. 그러게요, 오늘 몸 컨디션이 안 좋네요, 라고 말했어. 이상하지. 스스로 괜찮지 않은 이유를 짓는 거야. 오랜만에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나를 괜찮지 않게 봤으니까 맞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나 봐.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지. 저 괜찮은데요? 라고 답하면 내 컨디션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 머쓱해질 테니까. 난 거의 그래.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보다 상대를 신경 써. 싫어하는 음식도 상대가 좋아하면 먹어. 상대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나도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해. 별로 안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오래가는 불편한 번거로움을 배려라는 명목으로 이겨내. 실은 진짜 이기는 건지 모르겠어. 먹기 싫은 음식을 잔뜩 먹고 온 날이면 속이 더부룩하거든. 몸이라는 속과 마음이라는 속 모두.


오늘따라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생기네. 이 글을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나, 실은 올여름에 맨발 차림으로 저수지에 갔었다. 등이 젖을 만큼 날이 더운데 호수는 잔잔하니 시원해보이더라. 그곳에 빠지면 동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어. 만나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게 아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 발로 힘껏 정강이를 차 버리고 싶었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살면서 이런 고통을 주냐고. 상담 선생님이 말하길 기일이 가장 힘들다던데 그때를 마냥 기다리기에는 버티기 어려워서 먼저 찾아왔다고 얘기하면서. 그렇게 남은 사람보다 떠난 사람에게 줄 편지를 마음에 안고 뛰어들려던 참이었는데.


기쁘거나 슬플 때마다 모두가 있는 온라인에 글을 발행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또 알리고 싶은 거야. 나 간다고. 글 쓸 힘은 없는데 말할 힘은 있더라. 친구한테 전화하기에는 애들이 모두 출근하거나 자기소개서를 쓸 시간이어서 상담원에게 전화를 걸었어. 밤에는 통화연결음만 무제한으로 가던데 낮이라 그런지 금방 걸리더라. 신기했어. 선생님 말을 들어보니까 낮에는 통화량이 훨씬 적대. 그래서 언젠가 두 번째 책을 쓰면 그 내용을 담고 싶더라. 밤만 어떻게 버티면 괜찮은 낮이 올 거라는 이야기. 선생님은 내 얘기를 묵묵히 듣더니 숨을 고르게 내쉬래. 후, 하, 후, 하 하고. 나 따라 오십 번만 숨 쉬자는 거야. 나는 또 거절을 어려워하는 사람이잖아. 거기서까지 싫다고 말을 못 하겠는 거지. 나를 생각해주는 조언이니까. 또 쉬래서 쉬었다. 나랑 숨을 무려 오십 번이나 같이 쉬어주는 사람이 수화기를 잡고 있다니까 조금 든든하더라. 같이 숨 쉬어주는 게 그렇게 큰 힘인지 몰랐어.


그렇게 오늘까지 살았다. 선생님이 겁을 주던 동생의 기일까지. 겁인지 예언인지 모를 말을 들어서 그런지 낮부터 먹먹해지더라. 네게만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안 믿기거든. 동생이 독일에 연인이랑 살고 있을 것 같아. 가족이 지긋지긋하게 싫다고 했으니까 우리와 연을 끊고 행복을 찾으며 지내고 있을 것 같거든. 현실은 영정 사진을 걸어야 해. 걔가 좋아하는 음식을 올려야 해. 절은 할 수 있을까. 예의를 갖추라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마음이 동생에게는 예의를 갖추기 싫대. 어린 사람을 존중하자고 해놓고는. 꼰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뒤면 엄마는 울고 아빠는 눈물을 닦고 막내는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할 거야.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지금까지 견디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럴 때면 나와 함께 숨 쉬어준 사람들이 떠올라서 차마 떠날 수가 없었어.


괜찮은데 누군가 괜찮지 않아 보인다고 물었을 때 괜찮다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결론을 전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가끔은 글이 기승전결을 갖추지 않고 끝나도 되지 않을까. 살아있으니까 다음 글은 더 좋게 쓸 기회가 있잖아. 지울 수 있는 기회와 바꿀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상태 표시줄에 적힌 날씨를 보니까 제주는 실안개가 펼쳐졌대. 사전에 쳐보니까 엷게 낀 안개라던데. 단어가 참 예쁘다. 아직도 모르는 예쁜 단어가 있어 다행이야. 그 단어를 모두 줍기에는 인생이 짧겠지. 세상에 한글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단어를 전부 기억하기 부족할 만큼 인생이 짧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나는 모르는 아름다운 언어를 줍고 써둔 이야기를 고치고 책이라는 편지를 매만지고. 너와 함께 오십 번 이상 숨을 들이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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