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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Feb 18. 2022

좋아하는 이와의
당일 취소


약속이 당일에 취소됐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성격을 나눈다면 슬퍼하는 사람과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테다. 나는 둘 다 겪어보았다. 한창 타인들에게서 힘을 얻던 시절에는 약속이 취소되면 급하게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라도 빈 시간을 채웠다. 차츰 관계에서 데이는 횟수가 늘어난 뒤에는 약속이 취소되면 다행이라는 안도가 들었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약속을 잡았는데, 만일 그 자리에서 실수를 한다면 시간과 관심을 내었는데도 외려 관계가 후퇴하는 슬픈 결과가 나오니 일방적으로 취소를 당해 상대가 내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쪽이 더 나은 선택지라 믿었다.


그러나 취소되는 상황에 집이라는 변수를 더하면 기쁠 사람도 대부분 슬퍼하리라는 걸 서울을 벗어나고서야 알았다. 서울에 집이 없는 나는 친구를 보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했으니 굳이 따지면 집 근처에서 친구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이 든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면, 그래서 호텔에 덩그러니 남아 갈 곳을 잃은 채 서울 구경을 했을 때면 찾아오는 공허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 여름날에는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는데 친구가 당일 취소를 했다. 차마 서울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 비행기표와 엇비슷한 취소 수수료를 내고 급히 제주로 돌아왔다. 친구는 갑작스럽게 약속을 깨뜨린 뒤에도 나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내가 서울에 사는 사람처럼 다음 약속을 기약할 뿐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를 그 사건으로 잃은 뒤 친구를 만난다는 이유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일을 그만두었다. 일적으로 일정이 잡히면 그 일정만 서둘러 오전에 해결한 뒤 오후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오는 일을 택했다. 그러나 춘천에서의 일정을 끝낸 뒤 인류애가 생긴 나는 오랜만에 오직 친구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보는 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는 표를 미루고 몸만 한 이십 인치 배낭을 멘 채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다. 친구들은 제 집처럼 지내라며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먼 길을 와주어 고맙다며 요리를 차렸다. 손에 선물을 쥐여주었고 세상에서 너만큼 멋진 사람은 없다는 칭찬을 해주었다.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고민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하냐는 물음표였다. 친구들에게는 서운을 줄까 봐 굳이 그 물음표를 꺼내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알아주는 듯 애정을 베풀었다. 따라 충전된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입을 열 때마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차라리 입을 닫는 쪽이 관계를 이어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이라면 행할 수밖에 없는 서투름을 인정하고 고맙다는 진심을 전하기 위해 말을 골랐다. 일방적인 대화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상대를 궁금해한다는 나의 마음을 담아 특이한 질문을 궁리해냈다. 당신이 잠에 들 때 꾸는 꿈은 흑백인지 컬러인지, 추억이 많아 가장 기억에 남는 해는 언제인지.


다행히 이번 서울 여정에서는 만남을 취소하거나 미루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살다가 때때로 집 없는 타지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와 만남이 불발될 수 있다. 그때는 취소된 약속 하나로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나는 가치 없다는 사람이라고 단언하지 않기를. 친구와의 대화 외에도 각 지역에 즐길 것은 많으니 따로 묻지 않고 혼자 위풍당당하게 즐기겠다며 운동화를 동여매고 밖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고대하던 만남이 취소되었음에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건 잠깐 뿐, 홀로 재밌게 놀겠다는 명랑함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역 곳곳에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새로운 인연과 닿아 계획에 없던 여행이 만들어지는 신기한 경험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다가올 봄의 초입에 마음 가는 사람과 약속을 잡았다. 오직 사람을 보겠다는 목적 하나로 서울에서 며칠을 더 머문다. 이제야 막 약속이 잡혔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기대하는 약속이 당일에 취소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감정을 지레짐작했다. 지금이 행복하면 일어나지 않은 불행한 일을 데려와 구태여 그 감정에 나를 집어넣는 일이 익숙했다. 제주 살이를 하러 내려온 친구가 떠올랐다. 살아온 지역도 접점도 없는데 대화가 너무 잘 맞은 나머지 벌써부터 함께 끝을 상상하던 우리. 이토록 얘기가 잘 통하는데 시간의 흐름 때문에 언젠가 대화의 결이 맞지 않으면 얼마나 슬플까 상상하던 우리. 맞는 인연을 만났을 때 인연이 엮인 지금 이 순간을 기뻐하지 않고 굳이 헤어짐을 그리는 것까지 똑 닮아 웃던 우리.


이번 약속이 취소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만일 취소되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풍경과 장소를 찾는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바라지 않는 대로 이루어진 대도 커다랗게 아쉬워하지 않도록 감정을 정돈한다. 오로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정을 비워 타지에 머물지만 약속이 취소되어도 뭐 어때, 하고. 거기서 생각의 꼬리를 자른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만남을 미루었다거나 약속이 사라진 미래의 내가 쓸쓸하게 타지에 남겨져 고독한 시간을 보내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우고.


사실 이런 결심은 부차적이고, 애초에 약속이 잡혔을 때 취소되어 슬프면 어쩌냐는 상상을 하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기억이 슬픔 어린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그리는 쪽으로 향하는 걸 보면 트라우마의 늪에서 점차 헤어 나오는 중이라는 확신이 든다. 됐다. 오늘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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