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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r 09. 2022

웃어보시겠어요?


"내가 부끄럽지 않아?"


과분한 응원과 사랑을 받은 덕에 독자님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그에게 대뜸 물었다. 지인에게 나를 소개하기 부끄럽지 않냐고. 그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대답했다. 꼬리처럼 뒤따라온 말이 심금을 울렸다. "나는 네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데, 네가 너를 부끄러워하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야." 하루는 내가 좋고 이틀은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데서 기인한 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다. 할머니가 어린 손녀 둘을 두고 농약을 들이켰다는 사실이, 아빠의 채찍질로 팔다리 이곳저곳에 연둣빛 멍이 들던 기억이, 연인이 생겼으니 어떠한 관계로 만나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엄마가, 세상이 싫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동생이, 친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유년시절이 안쓰럽고 미웠다. 가정교육만큼 중요한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엉망인 가정에서 자란 나 역시 덩달아 진창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빛보다 어둠에서 지내는 게 익숙했고 바라는 미래를 그리지 않는 편이 수월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생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흐르고 몇 백 권의 책을 읽으며 가족과 나를 비로소 떨어뜨려두었을 때부터 당당한 태도를 품었는데,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가정을 꾸리고 싶은 기묘한 사랑이 시작되자 불현듯 상견례가 상상되었고 내가 앓는 병이 혹시나 애인을 괴롭힐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울적해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인터넷에 올린 글은 지우면 그만이지만 책은 회수할 수 없고 실명 역시 바꿀 마음이 없어서 누가 나를 알아내려 마음만 약간 먹는다면 금세 궤적을 뜯어낼 수 있었다. 고작 자료 조사 몇 가지 한 것 가지고 편견을 생겨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의 친한 지인이라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나로 인해 지인과 연을 끊으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천천히 흩어졌다. 미래를 그리지 말고 이 순간만 집중하며 가벼운 만남을 즐기자, 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들면 다시 또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고민했다. 올봄 시작할 온라인 강의에서도 예비 수강생이 내 글을 읽고 매사 울적하고 염세적인 성격의 사람이라는 편견을 덧입히면 어쩌나 싶었다.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쩌나 싶었다. 어렵사리 자원한 강의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 우선 해보고 결정하는 게 낫다며 사진 촬영을 미루지 않고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촬영은 크게 세 가지의 장면을 찍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글을 쓰는 풍경과 책을 읽는 자세, 끝으로는 대상을 받은 화면을 창에 띄워놓는 거였다. 나는 세 번째 사진에서 주춤거렸다. 대상을 받은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으나 심사평에는 자살 사별자가 아닌 일상 사별자의 품으로, 라는 말로 시작하며 자살이라는 단어가 명백히 쓰여 있었다. 사진작가님과 매니저님이 나를 검색하면 이미 알 수 있었겠으나 모를 가능성도 충분했고 강의 신청 화면에 동생을 잃었다는 정보를 화면 가득히 보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섣부르게 그렇다고 답할 용기가 없었다. 어차피 책이 출간되면 부끄러울 것도 없겠으나 출간되기 이전의 나는 내가, 그러니까 내가 지내고 살아왔던 모든 사건이 몸서리치게 창피했다. 이제껏 했던 강의와 달리 온라인 강의는 일상을 지키는 밝아지는 습관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여서 카메라 앞에 서는데 자꾸만 내 옷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웃어보시겠어요?"


사진작가님이 카메라 스위치를 눌렀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가를 후들후들 떨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요아 님,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아요, 눈이 웃고 있지 않은 걸요, 나는 심호흡을 몇 번 들이쉬고 눈에 힘을 주어 눈꼬리를 접었다. 사진작가님과 매니저님은 있는 그대로의 웃음을 짓게 만들기 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시려 애썼다. 나는 그 노고에 감동해 웃었다, 라고 맺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제대로 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분들이 속으로 나를 불쌍하게 여기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피어올라 자꾸만 사진 촬영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와 어울리는 사진은 브런치 프로필처럼 딱딱한 무표정이어야 할 것만 같았다. 능숙한 사진작가님은 나와 대화하며 중간중간 설핏 웃음을 띄는 내 모습을 간신히 포착해 카메라에 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진을 건졌으니 남은 사진은 심사평이 기록된 대상 수상 화면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붙잡으며 페이지를 열었다. 사진작가님과 매니저님은 말없이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사진을 더 잘 찍을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괜히 벽 쪽을 더듬으며 거닐던 나는 촬영이 끝났다는 이야기에 빠르게 화면을 껐다. 찍은 사진 보시겠어요? 사진작가님이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과연 프로라 그런지 어색함 없이 활짝 웃는 내 얼굴이 작은 화면을 꽉 채웠다. 나도 이렇게 환할 수 있구나, 감상에 젖어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웃을 때만 보이는 인디언 보조개가, 드라큘라처럼 솟은 왼쪽 덧니가 매력적이었다.


웃는 표정이라는 거,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막상 보니 아니었다. 나는 걱정 없이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진을 찍고 나오는 길 진심 어린 미소를 보이며 신발장으로 향했다. 귀찮아 접어 신은 신발 뒤꿈치가 눈에 띄었다. 무릎을 숙인 뒤 판판하게 펴서 다시 발을 넣었다. 편안했다. 너무 편안하고 아늑해서, 왜 이제까지 제대로 신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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