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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r 29. 2022

죄책감으로 빚은 행복


벚꽃이 만개한 제주길을 따라 자살예방센터로 들어섰다. 새로  얇은 코트를 꺼내 입었는데 등이 젖어올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오랜만에  상담 선생님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브런치 글을 가끔씩 읽어 주시는 덕분에 단번에 애인이 생기셨음을 맞추셨다. 선생님은 애인이 제주에 사는지 서울에 사는지 물었고 서울에 산다는  답에 얼른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겠다고 호쾌한 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덩달아 웃다 이내 얼굴을 무표정으로 다듬었다. 생각 없이 웃어서는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였다. 애인생겨 부럽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애인과 시답잖은 이야기로 농담을 주고받을 때마다 드는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이렇게 웃어서는    같았다. 동생과 영영 이별하고야  동생의 애인이 떠올라서였다.


영원히 잠든 동생을 발견해 신고한 사람은 다름 아닌 동생의 애인이었다. 나는 스스로 생을 등진 동생의 마지막 사진을 보았던 것만으로 이토록 심한 트라우마가 남았는데, 동생의 애인은 실물로 보았으니 감히 말도 못 꺼낼 정도로 당혹스럽고 괴로웠을 것이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애인은 동생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냈고 취조 내내 울부짖었다고 했다. 나는 동생의 주소록에서 그의 이름을 꺼내 연락하려 했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우리라는 둘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기다란 공백만으로 대화가 마무리될 것 같아서 영영 꺼내지 못한 채 동생의 번호를 바꾸고 스마트폰을 초기화시켰다. 애인이 생겼다고 웃음 짓던 동생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어떻게 만났는지 시시콜콜하게 떠들고 어떻게 다퉜는지 화를 내며 고민을 상담하던 동생이 떠올라 차마 그라는 존재를 머릿속에서 복기할 수 없었다.


지난 주, 애인의 어깨에 기대 낮잠을 청하던 때도 이렇게 나른하니 행복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자책감이 들어 빠르게 커피를 비웠다. 동생의 애인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을 게 분명한데, 어쩌면 지워지지 않는 장면을 잊고자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을 게 확실한데 나는 한가롭게 애인의 어깨에 기대 밀려오는 졸음을 느낌과 더불어 온기를 느낀다는 게 복에 겨워보였다. 애인은 피곤하면 조금 더 눈을 붙이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따로 이유를 꺼내지 못하고 그냥, 갑자기 잠이 안 오네, 하며 멀어졌다. 즐거울 게 뻔한 데이트를 앞두고 번번이 명확한 사유 없이 약속을 취소하려 했던 이유도 동생의 애인을 향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당신처럼 나도 괴롭겠다고, 당신이 겪은 아픔처럼 나도 아파하겠다고 부치지 못할 편지를 매일 밤 썼다.


만남 초창기에는 보는 사람마저 무겁게 밝은 척을 하던 내가 어느새 가벼워졌다고 말씀하시는 상담 선생님의 앞에 앉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실은요, 행복할 때마다 동생 애인이 떠올라서 죄책감이 들어요. 선생님은 그게 무슨 말이시냐고 되물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동생의 애인 분은 찾아온 봄도 만끽하지 못하고 있을 거잖아요, 고작 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잊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나도 함께 불행해야 할 것만 같다고, 새로 만난 인연과의 행복은 꿈도 꾸면 안 될 것 같다는 자책감이 든다고. 선생님은 차분하게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요아 씨가 불행하다고 그분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 애초에, 하면서 선생님이 눈을 깜빡였다. 두 분 다 행복하시면 되잖아요.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에 허탈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네요, 둘 다 행복하면 되는 거였네요.


이번 주 주말에는 애인을 보러 서울로 올라간다. 고작 삼사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는 다시 어떻게 하면 약속을 깰 수 있을지 고민했다. 동생 애인에게 미안하니 급기야 얼른 헤어져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빨리 마음을 정리하라고 재촉했다. 행복해서는 안 되니까, 동생의 애인은 못 볼 것을 봤으니까 나도 계속해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야 한다고 닦달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그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둘 다 불행하면, 좋은 쪽은 두 명이라는 편을 얻은 불행이라는 녀석뿐이었다. 그와 내가 둘 다 행복해질 수 있는 나날이 눈앞에 있는데 모른 체하고 불행 안에서 몸을 사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동생의 애인에게 전할 마음속 편지를 새로 썼다. 미안해요, 가 아니라 행복하세요, 로. 제가 함께 불행해질게요, 가 아니라 우리 둘 다 행복해져요, 로. 편지를 발송했다. 이 메시지가 그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눈을 감고 휘날리는 벚꽃을 맞았다. 봄이다,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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