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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11. 2022

백만 원의 서울 월세


교보문고에 들러 해마다 나오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샀다. 예매해둔 영화가 시작되기까지는 네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이렇게 많이 남은 이상 서점에서 책을 읽고 가려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엉덩이를 붙일 만한 모든 곳이 막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가장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늘 마신 아메리카노만 해도 벌써 석 잔 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을 조금 더 내고 책을 읽을 만큼 널찍한 숙소를 구할걸 싶어졌다.


장거리 연애에 지쳐 애인과 일을 벌였다. 애인의 회사가 위치한 강남 근처에 이 주간 에어비앤비를 빌려 살아버리자는 얘기였다. 사귄 지 한 달 만에 어떻게 동거를 하느냐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지인들에게는 비밀에 부쳤다. 다섯 평도 안 되는 방이 강남에 위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주에 오십만 원이었다. 어떻게 보면 비싸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저렴한 것 같기도 했다. 금요일에 제주로 와서 일요일에 올라가는 비행기표가 십만 원이 넘었으니 이주에 오십이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큰 고민 없이 돈을 모아 숙소를 빌렸다. 마음껏 걸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한 방에서 우리는 얼굴을 보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은 복잡이라는 단어로 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어깨를 들이밀며 화를 담은 한숨을 내쉬었고 각종 성형 광고로 도배된 길거리에서 회사원들은 한데 모여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육 년을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적응하기 어려운 길거리에서 어디선가 읽었던 협상의 기술이 떠올랐다. 협상이 필요한 상대를 만날 때는 상대의 구역에 가기보다 서로 가지 못한 중간지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것. 상대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기세에 짓눌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애인을 보러 애인 회사 근처에 숙소를 잡은 나는 연애라는 협상을 하기도 전에 져 버리고 만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열었는데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서울 2030 세대, 행복감 낮아지고 대인관계, 재정상태 스트레스 커’라는 헤드라인의 기사였다. 내용을 읽으니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의 거의 절반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비단 서울에 사는 청년들만 이렇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은 서울의 집값이 원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주에서 빌린 원룸은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 삼십오만 원인데 강남에 빌린 방보다 두 배는 넓었다. 일억의 전세자금 대출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일억을 맞춘 원룸은 다섯 평이거나 역 근처에 있으면 반지하이기도 했다. 서울을 떠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침대를 두면 마음 놓고 걸어 다니지도 못할 좁은 방에 사는 게 힘들어서였다. 감염병으로 재택근무가 활성화됐다지만 재택의 재도 꺼내지 못할 작은 기업에서 미래를 엿볼 수 없어서였다.


당시 만났던  연인은 내게 가장 커다란 방패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이 밀려오는 지하철 안에서를 나를 안아   틈을 만들어 주었고 불안장애로 쓰러질  같을 때마다 어깨를 내주었다. 내가  많이 의지할수록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웠고, 의지하지 않고서야  배길 만큼 상황이 심각해질  그는 나를 두고 홀연히 등을 돌렸다. 이별을 천천히 받아들인 순간부터  마음은 서울을 떠났다. 떠난 마음은 몸까지 떠나게 만들었고 그렇게    제주에 살았던 나는 새로운 연인과 다시  지긋지긋한 도시에 발을 담갔다. 마음에 드는 회사와 애인과 친구가 없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서울이지만  모든  제외하면  이유의 반절이 날아가므로 어쩔  없이 택해야 하는 도시인 서울에서 나는 리빙 하우스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널따란 작업공간이 마련된, 만나고 싶은 동료들이 가득한  백만  리빙 하우스에서.


작가 하현은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라는 책에서 내일의 행복은 내일에 있으니 우리는 오늘 행복하자고 말한다. 지금껏 집을 구하기 위해 세운 나만의 기준은 내일의 행복이었다. 미래에 있을 지금은 모를 행복을 바라보며 집을 구했다. 오 년 뒤 살 집은 투룸이리라고, 십 년 뒤 살집은 서울 외곽의 단독주택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지옥고에 살았다.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의 초성을 딴 지옥고에서 나는 우울증 약을 먹으며 하루를 버텼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매달 돌아오는 월세일이 아깝고 아쉽다. 한 평이 겨우 될까 말까 하는 고시원이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사십오만 원이라는 게, 겨울의 시시각각 면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옥탑방이 보증금 오백만 원이라는 이유로 오십만 원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가진 돈이 삼백만 원뿐이었을 때는 차선책이 없었으므로 그저 살아야 했다. 묵묵히 미래를 그리며 살아야 했다. 영원히 미래를 그릴 줄 알았던 스물셋은 어느 날 미래가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확신에 휩싸였고 그때 빠르게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직면했다.


그 이후 일확천금을 벌었다면 이 얘기는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났겠지만 이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 지향형이다.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어 적은 보증금과 월세로 탁 트인 방에 살 수 있지만 이 돈을 서울로 품고 오는 순간 해외도 아닌데 전혀 다른 방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대출을 해서 전세방에 살며 월세를 아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월세를 내는 건 이 부동산 시장에 이용당하는 사람이라며 혀를 찬다. 나는 사람들의 혀 가운데서 떳떳하게 백만 원의 월세를 낼 준비가 되어 있다. 마땅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방값에 백만 원의 거금을 선뜻 내겠다는 동기는 단순하다. 서울에서 오늘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게는 월 백만 원의 월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치솟는 집값을 형성한 사람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지만 우선 먹고 오늘을 살아야 내일 멱살을 잡을 힘이 생기기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향해 집을 본다.


월 십만 원 아끼면 창문이 작아지고 거기서 십만 원을 더 아끼면 층수가 낮아진다. 나는 높은 층수에서 숲이 우거진 창문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고 싶다. 미래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아픈 생각으로 해석되지 않는 집에서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잠깐 감았다 뜨고 싶다. 푹 자고 일어났지만 해는 여전히 어스름하게 떠 있고 나는 기지개를 켜며 못다 한 잠을 다시 자겠지. 내일의 행복은 내일의 내가 만끽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오늘의 나는 오늘의 행복을 아낌없이 누리고. 현재가 악몽인 탓에 눈을 감으면 즐거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며 억지로 잠을 청하던 이전과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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