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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14. 2022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최근 이 주 동안 신변 정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극에 달했다. 단순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숨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물고 부순 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개명을 하고 친구부터 가족, 연인을 포함한 모든 관계와 절연을 한 뒤 부산 어딘가에서 새 이름과 새 삶으로 하루를 맞고 싶다는 바람이 점점 거세지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놓고 싶다는 충동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온라인 강의에 도전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관두고 싶었고 명예욕도 다 흩어져서 교보문고에 얼굴이 걸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부자가 되고 싶은 꿈을 지녔으나 재테크와 관련된 책은 이 시대에서 조용한 부자란 없다고, 계속 떠들어야 돈이 벌린다고 말했다. 자신이 지닌 가치와 지식을 나누고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해야만 돈이 벌리는 구조에 대해 세세하게 적은 책을 읽으며 주먹을 쥐었다. 조금만 더 현요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지내보자고.


차에 치일 뻔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살리겠다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건 자해의 한 종류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날카로운 물건을 찾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수년간 맹세했으니 그 사이의 빈틈을 헤집은 결과가 자신을 희생하며 몸을 던지는 행위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뻐끔거리는 입을 가만히 바라봤다. 희생을 하겠다는 마음을 지니는 일이 편법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스스로가 현명해 보였는데 심각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느냐 하면 신변 정리가 삶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의 편법과 같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는 삶과 삶을 둘러싼 요소에 애착이 없었고 나 자신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지겨워 언제든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죽으면 안 되겠다는 여러 대답을 한 뒤에야 삶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대처법을 모색했고 그 대안이 바로 개명을 하고 인연을 끊고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차곡차곡 추억을 쌓아 나가는 일이었다.


언제든 신변 정리를 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새롭게 나타나자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즉각 계약하고 싶은 사람처럼 얼른 신변 정리를 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한적한 마을에서 홀로 조용히 하루를 영위하는 상상을 했다. 글을 쓰는 나라는 아이덴티티도 모두 지우고 싶었다. 글로 조금 인정받았다고 우쭐거리는 내 모습이 보기 싫어서였다. 강의를 하겠다고 자원한 모양도 우스웠고 상대가 웃으면 나에 대한 비웃음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생각을 지닌 내가 돈을 조금 벌어보겠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웃어야 하는 모양이 안쓰러웠다. 글에 관한 재능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작은 회사에서 서툴게 디자인을 하며 착한 동료와 저녁으로 맥주를 기울이며 집을 꾸미는 법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브랜딩이 잘 된 인플루언서를 희망하고 있었다. 숨고 싶은 내가 등장할 때면 나타나고 싶은 나를 질책했다. 온라인에 얼굴과 이름과 마음을 허물없이 공유하는 내가 못 미더웠다. 막상 쓸 때는 사람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안고 썼으면서, 다음날 이름과 얼굴을 바꾸고 숨고 싶은 내가 나타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책을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세 번째 책은 언제 나오냐는 물음을 들으면 더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올여름에 나올 책이 잘 되지 않으면 나는 책을 그만 쓸 예정이라고. 단순히 책이 팔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 외의 다른 세계를 유영하고 싶어서다. 물에 뜨지 못하는 내가 어쩌면 수영 강사가 될 수도 있고 바이올린을 켜는 법도 모르는 내가 바이올린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글이라는 하나의 분야로 나를 옭아매고 싶지 않다. 글 조금 배우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법을 조금 익혔다고 해서 으스대는 나를 지우고 싶다. 문예창작과를 희망하는 후배에게 어느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문예창작과에 가면 글이 모두 비슷비슷해진다고, 글을 구성하는 가장 큰 재료는 이야기니 사회학과에 가서 이야기를 쌓으라고. 나는 글에 대해 알량한 자존심이 살아날 때마다 선배의 조언을 곱씹는다. 그러다 문득 내가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망은 결국 더 풍부한 글을 쓰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것인지 궁금증이 든다.


그제는 원데이 글쓰기 모임을 나갔다. 글 말고 다른 취미를 체험하고 싶다고 그렇게 떠들어댔으면서 다시 글이라는 이야기에 발걸음을 살금살금 옮긴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았다. 회사에서 겪은 아픈 얘기를 낱낱이 해부해 마음을 치유하고 싶은 사람과 글을 쓰고 싶어 카피라이터가 된 사람과 글을 쓰고 싶어 시간과 정성과 돈을 내어 주말에 글을 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그만 아득해졌다. 사람들이 내 글에 내어준 시간에 보답하기 위해 더 잘 쓰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에. 작가님,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저는 작가가 아니에요, 라고 답하려다가 그건 나뿐만 아니라 글을 좋아하는 상대들에게도 잘못하는 일인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속한 세계에서 도망치고 싶으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까지 이렇게 글로 한 올 한 올 꿰매며 등장하고 싶은 마음이 우습다. 이 장황한 생각의 흐름은 이틀은 숨고 싶고 하루는 드러나고 싶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하는 일을 브랜딩으로 포장해서 내보내야 하는 은둔자에게 부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가 때로는 어이없지만 어이없다고 하면 스스로가 또 미워질 테니까 이렇게 말해본다. 아, 귀엽네. 이 말은 삶에 있어 거대한 결정을 섣불리 하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보며 후회하는 내게 말해도 효력이 생긴다. 아유, 귀엽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쓰는 귀여움이라는 말이 생겼으면 좋겠다. 세상에 자책을 대신하는 단어는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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