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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y 12. 2022

칠 년 간의 기록을 잃어버리고 나서


찌뿌둥하게 일어나 반사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생각할 틈 없이 자동적으로 앉지 않으면 종일 아무것도 읽거나 쓰지 않고 하루를 충분히 보낼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전원을 켜고 하품을 하는데 왼쪽 하단에 낯선 창이 떴다. 유에스비를 인식하지 못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인터넷 오류 팝업을 보듯 가볍게 그래, 가끔은 그럴 수도 있지…… 하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유에스비를 뽑고 노트북 전원을 껐다가 켜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도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무릎에 힘이 풀렸는데 다행히 의자에 앉은 채여서 바닥에 주저앉지는 않았다.


유에스비에는 칠 년 간의 기록이 모두 담겨 있었다. 습작했던 파일부터 장편과 단편을 불문한 소설과 동화, 에세이 공모전에 냈던 숱한 수필들, 그리고 아직 완성하지 않은 시나리오와 마케터 생활을 하며 모아둔 포트폴리오 자료까지 빼곡하게 저장되었는데 중요한 건 고장 난 유에스비를 제외하고 다른 곳에 저장을 해두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는 마른세수를 정확히 다섯 번 하고 나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백업 전문 업체에 연락하면 되지 않을까? 돈이 조금 많이 든대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찾아보는데 유에스비는 물리적으로 고장 나면 복구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가득했다. 안 그래도 엉망진창으로 썼던지라 유에스비가 잔뜩 휘어 있었으므로 나는 지난날의 안일한 나를 회상하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살았을까? 유에스비를 고쳐야겠다는 마음이 사그라들자 그런 물음이 들었다. 지난날의 글이 모두 든 유에스비가 고장 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었는데 너무 당연해서 무료하고 슬프다며 징징거린 내가 귀여웠다. 포트폴리오가 사라졌으니 취업도 어렵고 소설과 시나리오가 사라졌으니 이제 글을 쓰거든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 다행히 여름에 나올 책은 편집자님께 보낸 메일함에 저장되어 있어서 한숨을 돌렸다. 그것마저 메일함에 없었더라면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유에스비를 집에 두고 자전거를 빌렸다. 제주의 장점을 꼽자면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릴  있다는 . 유에스비를 고칠 생각은  버리고 자전거를   소리를 지르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으나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혹시 최근에 도두에서 소리 지르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봤다면 아마 나였을 거다. 실시간 소식을 우선시하는 요즘 세대의 특징에 맞게 인스타그램을 켜서 유에스비가 고장 났네요.   간의 기록이 사라졌습니다, 하고 글을 올렸다.  그래도 머릿속에 있으니 괜찮겠죠? 나름 유쾌하게 글을 썼는데 하나도 재치 있어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실시간으로 위로의 댓글을 달아주셨다. 그게 그렇게 기뻤다. 그래, 사람들은 유에스비처럼 날아가지 않아! 한순간에 고장 났다며 돌아서지 않아!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애인에게 연락이 왔다. 괜찮아? 사람이 해탈하면 괜찮지 않아도 뻔뻔하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깨달은 나는 당연하지, 내 머릿속에 있잖아,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안 괜찮다고 답했다. 신기하게 애인 앞에서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애인에게서 괜찮냐는 연락을 받자 나는 문득 시야가 또렷해지는 광경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브라우니와 얼그레이 스콘과 라떼를 홀짝이며 바다 풍경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구나? 다시 자전거를 빌려 집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탄성이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안고 노트북에게 편지를 썼다. 자, 네가 잘못이든 유에스비가 잘못이든 화해를 하자, 그러고 나서 나를 기쁘게 해주는 거야, 어때? 깜짝 카메라에 충분히 속았으니 너희들은 거짓말이라고 말해주면 돼, 하고 노트북을 켰더니 신기하게 유에스비가 인식이 되었다. 그간의 글 묶음이 차르르 나타났고 포트폴리오는 글꼴 하나 깨지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너무 감격하면 눈물도 나오지 않고 얕은 신음만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이라면, 안주하지 말고 백업할 것. 백업은 다다익선이라는 케케묵은 말을 진심 담아 소리칠 준비가 되었다. 백업은 다다익선! 백업은 다다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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