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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y 20. 2022

다 망하면 어떡하지?


커피를 사들고 원룸으로 가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망하면 어떡하지? 떠오른 생각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작게는 거래를 맺은 스타트업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냐는 생각부터 크게는 브런치라거나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이 사라져 내가 투여한 시간과 노력이 헛수고가 되면 어떻게 하냐는 생각이 물밀듯이 쓸려왔다. 투자 실수로 몇 년을 모아둔 돈이 모조리 사라지면 어쩌냐는 고민이 들었고 과외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지 못해 다음 과외 수입이 끊기면 생활비를 어디서 벌어야 하냐는 심각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세계 경제가 붕괴되고 돈의 쓸모가 사라지면 돈을 모으려 급급했던 내 지난 세월은 얼마나 허망할까 싶은 디스토피아까지 그리니 입맛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다 망한 것 같았다.


명상을 통해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애쓰기도 했다. 명상의 원리는 대개 부유하는 생각이 과거나 미래에 머무니 그 생각을 현재로 데려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습관을 놓으라는 얘기였다. 손을 무릎에 올리고 가부좌를 튼 뒤 눈을 감았는데 자꾸만 반발심이 생겼다. 어떻게 현재에만 안주할 수 있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고민하고 상상해야 대비하는 거 아니야. 안일하게 지금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미래 역시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는 짜증이 몰려오자 눈을 감고 현재에 집중하는 명상을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역시 다 망한 것 같았다.


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것도 필요 없어 보였다. 애플 워치를 사겠다고 생활비 일부를 떼어 저금하는 모습도 부질없었고 친구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맡은 일은 얼마 있지도 않은데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성을 차리고 직시하면 아직 망하지 않았는데 외모고 체형이고 능력이고 미래고 모두 쓸모 없어진 것 같아서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최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이토록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 과연 내가 노인이 되어서도 적응할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제는 짬뽕집에 갔는데 로봇이 기다랗고 꼬불꼬불한 복도를 지나 군만두를 흔들림 없이 배달해주었다. 서울 기념관에서 커피를 타는 로봇은 본 적 있지만 제주의 구석에서 로봇이 이토록 생활에 밀접하게 찾아온 광경을 본 적은 처음이라 생경하고 기분이 나빴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해서 더 기분 나빴던 것 같다. 커피를 타고 배달을 하고 청소를 하는 로봇이 생겨도 우리는 좀처럼 여유를 찾지 못한다. 일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죽고 일은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 망하게 되어있다는 게 아득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과연 이 글을 발행해도 될지 의문이 든다. 너무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느낌이 풀풀 난다.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고등학생 막내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내일 지구가 망하면 너는 오늘 뭘 할 거야?" 막내는 혼자 크크대다가 입을 뗐다.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소." 스피노자를 따라 하는 근엄한 막내의 얘기에 나도 웃음기가 돌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찡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시대가 다른 어느 철학자의 말보다 김치를 써는 막내의 입에서 나온 사과나무가 마음을 더 울렸다. 지구의 온도는 급격히 오르고 바이러스로 세상은 어지럽다. 일하는 방식은 때마다 변하고 있고 새로운 기술은 어느덧 우리 앞에 찾아왔다. 언젠가 나보다 에세이를 유려하게 쓰는 로봇이 내 일자리를 뺏을 수 있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하다가 그러면 나무를 심는 직업에 들어가겠다고 주먹을 쥔다. 아직 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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