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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l 23. 2022

나는, 다 기억한다?


"잘 거지? 불 끈다?"


스위치에 손을 올려놓자 막내가 침대에 누워 엄지를 척하고 들이밀었다.


"자리끼도 준비해두었지롱."


막내가 침대 상판에 있는 생수를 가리켰다. 자리끼,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해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해 두는 물. 막내가 초등학교에 올라갈 때 "자리끼를 가지고 오도록!" 하며 부러 어른스럽게 크흠, 소리를 내며 새로 배운 단어를 자랑했는데 그걸 열여덟이 될 때까지 기억하고 있던 거였다. 나는 그 말에 괜히 찡해서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라고 괜히 딴청을 피웠다. 막내는 기다렸다는 듯 "나는 다 기억해"라면서 대사를 복기하듯 상황을 줄줄이 읊었다.


"덧셈이랑 곱셈이 있으면 곱셈 먼저 해야 하는 것도, 누나가 나한테 잠 안 자면 설인 온다!라고 으름장 놓던 것도, 누나가 쓴 동화 '꾸깃꾸깃 오만 원'도, 누나가 처음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잠수영'이라는 소설을 쓸 때 내가 옆에서 커다란 종이 펼쳐서 이야기 만드는 거 도와준 것도 모두 기억해."


울컥 눈물이 나오려던 걸 꾹꾹 삼키며 퉁명스러운 어투로 "잠이나 자, 바보야."하고 불을 껐다. 나는, 나는, 다 기억해. 사실 그 말은 내게 트라우마 중 하나였다. 작별을 고하지 않고 영영 떠나버린 여동생은 화가 날 때면 함께 슬리퍼도 채 신지 않고 맨발로 손을 잡고 도망쳤던 기억이라거나 분에 못 이겨 커다랗게 망신을 준 나의 모습을 또렷하게 얘기했다. 언니는 내가 모를 줄 알지? 나는 다 기억해, 그 말을 듣노라면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았다. 너를 지켜주려고 한 행동인데 너에게 상처를 줬다며 미안하다고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생과의 일화는 한 권의 책으로 마무리지었으니 이제 나는 행복한 이야기만 쓸 테지만, 어제는 막내와 여동생의 같은 말이 충돌하며 머리를 덥혔다. 여동생에게 차마 빌지 못한 용서를 막내가 대신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누나가 나에게 잘해주었던 걸 다 기억해, 유행하는 애니메이션에 맞춰 시계를 사준 것도. 그 해 동생의 여름방학 숙제란에는 '이번 방학 중 가장 아쉬운 것'을 꼽는 항목이 있었다. 막내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큰 누나가 다시 서울로 가는 것."이라고 적었다.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서울에서 생활을 한다. 장거리 연애 중인 연인을 만나고, 그간 멀리 떨어졌던 친구들을 만나 빅토리아 케이크를 녹여 먹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서울에 살면서는 마음 한편에 동생들을 본가에 두고 이대로 나만 자유를 누려도 되나 싶었는데, 막내의 웃음 어린 "다 기억한다"는 말에 부채감과 죄책감을 내려놓고 훌훌 떠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든다.


막내는 아직 내가 쓴 에세이 두 권을 모두 읽지 않았다. 가볍게 이유를 물으면 글이 지겨워 읽기 싫다고 투정 거리지만, 내면에 숨겨진 진짜 이유를 안다. 너는 아직 상처를 열어 꼭꼭 씹기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네가 나와 술 한 잔을 기울일 만큼 커서, 네가 원하는 희귀 동물학과에 진학해 협회에서 동물을 보호하며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았을 때 내 책을 읽어주길, 누나가 너를 지켜주려 했던 진심 또한 기억해주기를. 누나는 두 명의 동생을 영원토록 품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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