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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l 27. 2022

좋아하는 분야의
프리랜서로 살아본 일 년


장비를 바꿨다. 신형 맥북으로.


이백만 원을 호가하는 맥북을 스스럼없이 구매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돈이 많아져서는 결코 아니고 훌륭한 장비로 더욱 멋진 글을 쓰고 싶어서다. 기존 노트북은 와이파이가 자주 끊겼고, 키보드 한쪽이 잘 눌리지 않아 받침 없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일쑤였다. 무거워서 에코백에 넣으면 한쪽 어깨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고 키감이 좋지 않아 돈을 더 주고 비싼 무접점 키보드를 준비해야 했다. 물론 그간 쓴 노트북으로 한 권의 책을 또 만들었으니 이전 노트북에 대한 험담은 이쯤 하고, 기존 맥북도 아니고 신형 맥북으로 장비를 업그레이드 한 가장 큰 이유인 프리랜서 생활을 소개하고 싶다. 어느덧 프리랜서를 선언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고, 그동안 나는 숱한 오프라인 강의와 밑미라는 플랫폼에서의 온라인 리추얼 메이커,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아 책 한 권을 냈다.


어느 독자님은 나를 계획파일 거라고 하셨지만, 실은 딴판이다. 일기도 제때 쓰지 않고, 기억력을 믿고 메모도 대충 한 나머지 글감을 종종 잃어버린다. 정해진 마감일에 엇비슷하게 파일을 내기도 하고, 메일에 답장을 잊어버려 상대방에게서 카톡이 오게끔 만들기도 하는…데…… 여기까지 오니 과연 내가 프리랜서 팁을 내놓아도 될지 의문이 생긴다. 그럼에도 나는 매주 다가오는 마감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고 대인 기피증과 발표 공포증을 앓으면서 카메라를 켜고 분위기를 리드했다. 와중에 동화 합평에 꼬박꼬박 참석했고 제주와 서울을 번갈아 다니며 일정을 소화했다. 출근과 퇴근 시간이 마땅히 정해져 있지 않은 프리랜서 생활, 대부분 집에서 일하니 편안한 옷으로 옷장이 꽉꽉 채워져 미팅이 생기면 급하게 옷을 사는 프리랜서, 도대체 취업은 언제 할 거냐고 윽박지르는 엄마의 곁에서 "나는 일을 하고 있어!"를 외치는 프리랜서 생활을 자그마치 일 년이나 성공했다는 건,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경력이 2년뿐인 사회 초년생이어서다.


생애 처음 들어간 인턴 생활에서 꿈이 무엇이냐 묻는 상사에게 "프리랜서요."라고 답하면 선배는 웃음기 가라앉은 얼굴로 진지하게 조언했다. "적어도 3년, 길게는 7년 정도 회사 생활을 해야 인맥이 쌓여서 프리랜서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야." 한 치 앞도 볼 수 없던 나는 그 말을 굳게 믿었고 상사가 내 이름을 뺏어 자신의 기사를 쓰든 방을 빌려 나를 욕하는 데 두 시간을 쓰든 상관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일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위치한 11층에서 잘못된 상상이 피어오르자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신기하게 다음 날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부당해고를 당했지만. 7년, 아니 3년을 일하지 않아도 프리랜서의 입지를 세우고 싶었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에세이 한 편을 썼다. 단기 아르바이트도 좋아하는 분야와 관련 있으면 억지로 포트폴리오에 욱여넣었다. 주변에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하는 에세이 작가를 태그해 인스타그램에 서평을 올렸다. 차차 작가님들은 나를 궁금해했고, 급기야 좋아하는 작가님에게서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노트북 한 대를 들고 카페를 돌아다니며 작업해도 되지만, 매 끼 밥을 먹어야 할뿐더러 부른 배에 음료를 계속 넣을 수는 없으므로 작업실이 중요하다. 나는 과감하게 부엌을 쓰지 못하는 넓은 방을 월세로 계약했다. 제주라 보증금이 백만 원이었다. 매일 디지털 노마드를 말로만 읊지 하지 말고, 진정한 디지털 노마드로 지방에서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다. 어려웠다. 제주에는 친구가 없고, 마땅한 일자리가 부재했으며, 예측할 수 없는 비행기 값에 오프라인 미팅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내 콘텐츠를 내보이면 커다란 곳이 아니어도 내 콘텐츠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기리라는 굳은 믿음을 지우지 않았다. 지방에 있는 나를 이해해 주고, 나를 보기 위해 시간을 쓰며 기다려 줄 사람이나 기업이 나타나리라는 믿음을 걷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로 제주청년센터에서 열린 청년 교생 공고문에 지원했다.





부족해도 괜찮다는 슬로건을 등에 업고 백지를 폈다. 내가 생각하는 에세이란 무엇인지, 에세이를 쓸 때 염두하는 법칙이 있다면 몇 개로 정리할 수 있을지, 에세이뿐만 아니라 내가 쓸 수 있는 장르의 글은 얼마나 다양한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면 글쓰기 책을 열 권 읽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야기를 나만의 체로 걸러내어 전달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제주시에서 수강료를 받고 다섯 회차의 강의를 끝냈다. 만족도 조사라는 부담을 피해 갈 수는 없었지만, 정성을 전하는 진심은 통하겠거니 생각하고 최대한 만족도 조사를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덕분에 후한 평가를 받아 제주청년센터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번아웃이 온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수업,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을 위한 글쓰기 수업, 이윽고 한국도박관리센터에서 도박 중독자 분들을 대상으로 심리 치유 글쓰기 수업을 도맡았다.


친한 친구와 만날 때도 떨릴 만큼 심하던 대인기피증이 사랑을 받으며 차차 나아졌다. 수업에 쓸 피피티를 만들다가 하기 싫으면 소리를 질렀다. 하기 싫어! 하기 싫어! 하기 싫다 말하면 더 하기 싫어질 것 같지만 그 모습이 처량하고 웃겨서 나 혼자 크하하 웃기도 했다. 가치를 돈에 두지 않으니 자연스레 돈이 따라왔다. 이제까지는 하기 싫어도 돈을 주면 어떤 일이든 했다. 백 페이지가 넘는 책을 무료로 디자인했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 자리에서 무료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 좌충우돌한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야 시간에 가치를 두었고 내 하루가 아깝지 않을 경험이 쌓일 만한 일들로 커리어를 차곡차곡 채워 나갔다. 힘들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브런치에 에세이를 썼다. 나를 옥죄는 불안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기력함, 짙은 밤을 두렵게 하는 우울감에 대해 썼다. 누군가 어떻게 그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제까지는 모두 나의 능력이라며 칭송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다소 울적한 글을 쓰더라도 나를 구성하는 면 전체가 울적하지는 않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단단한 계단을 지르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일을 하면서 떠난 동생을 애도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과정에서 힘들면 힘들다고 믿고 칭얼거렸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은 잔뜩 했다. 당연히 하기 싫은 일이 더 많았다. 그럴 때면, '나를 정말 필요로 하나 보군! 내가 한 번 도와주겠어!' 하는 당당한 자신감을 장착하고 자료를 만들었다.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는 수강생을 부담으로 쫓아버리기보다 나 또한 더 잘해주면 된다고 더 큰 감사를 내보였다. 이름만 보고 억지로 이은 인맥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쌓였다.




그러다 지난 12월, 카카오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불행 울타리 두르지 않는 법>으로 대상을 받았다. 대상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마저 나는 취업 준비생을 대상으로 막막한 불안함을 글로 승화하는 법에 대한 강의를 하는 중이었다. 먼 미래를 보지 않고 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익힌 덕분에 생존자가 되어 이렇게 일 년 간의 회고록까지 작성할 수 있었다. 한 번 해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떨어지던 밑미라는 플랫폼에서 루틴을 선사하는 리추얼 메이커에 지원했다. 한 차례 동화로 등단하고 러브콜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느 작가의 발돋움이었다. 모두들 플랫폼에서 수상 내역을 보고 먼저 연락 왔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을 받아도, 등단을 해도, 책을 내더라도 내가 여기 있다고 꾸준히 말해야 하는 게 프리랜서의 덕목임을 일찍이 깨달은 덕분에 부끄럼 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일 년 간 친구고 일자리고 모두 없는 제주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동시에 아픔을 해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픔을 내보여도 괜찮다고 말해준 독자님들과 지인들 덕분이었다. 그 초심을 그대로 끌어안고, 잊지 않고, 서울로 향한다. 제주 방에서 쓰던 하얗고 판판한 책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리고 제주가 아니면 쓰지 못했을 널따란 모니터를 판다. 서울에서 또한 몇 년을 살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갑자기 마음에 드는 기업이 생겨 취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는 나라는 이름의 기업에 다니고 있으므로 어느 곳을 가든 당당하다. 움츠렸던 어깨를 대담하게 펼 힘이 있다. 마케터와 작가라는 이름을 빼도 당당한 프리랜서가 꿈이다. 나라는 장르를 구축하는 프리랜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변치 않고 좋아하려면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은 단순하다. ‘계속’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어떤 과정이든 끝이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것.

_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 미디어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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