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출간 하루 만에 초판이 모두 팔릴 줄 알았더랬다. 떠오르는 젊은 작가로 발돋움하며 전국 서점에서 사인회 러브콜이 올 줄 알았더랬다.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이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책장을 덮고 이 책은 인생의 역작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당연인지 아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부러 책을 냈다는 사실을 잊고 세 권의 브런치 북을 만들며 다음 책을 준비한다. 그게 청소년 소설이든 동화든 시나리오든 에세이든 상관없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만 보며 글을 쓰는 몰입의 시간이야말로 비로소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다사다난한 활동을 통해 배웠으므로 "이번 책이 제 마지막 에세이입니다."라는 이야기는 덮어두려 한다.
누군가는 출판사의 요청 아래 대형 서점에 들어가는 기획 출판 자체가 성공이라 일컬었지만 한 차례 책을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초판을 모두 팔고 새로 인쇄에 들어가는 중쇄를 성공이라 여겼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책들이 중쇄를 찍을수록 점점 애가 탔고 내 책은 어디가 얼마나 부족한지 책상에 덩그러니 책만 두고 눈씨름을 하기도 했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서평을 읽고 독자님들은 내 책의 어느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어느 곳에서 감탄을 했는지 알아보았다. 꼬박 한 달 가까이를 그렇게 지내니 이제는 슬슬 다음 책을 준비해야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그건, 인터뷰에 응하는 내 태도에서 비추어보건대 그랬다. 어차피 중쇄를 찍은 책도 아닌데, 베스트셀러에 잠깐 올라갔을 뿐인데, 그것도 이틀뿐인데, 서평단을 제외하고 첫 책 보다 반응도 없어 보이는 신간이 괜스레 미웠다. 쓸 때 당시만 해도 이 이야기를 한 권의 묶음으로 완성한 자체가 성공이라 생각했으면서 막상 세상에 책을 내보내니 욕심이 끝없이 자라났다.
억지로 과거의 성과를 잊고 새벽에 구상해둔 청소년 소설을 쓰는데 울분이 울컥 솟았다. 내 에세이가 뭐가 부족해서, 마케터님도 편집자님도 이렇게 애를 쓰고 계신데 왜 도통 알려지지 않는 걸까, 그런 물음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새로운 글쓰기 작법서를 찾기 위해 헤맸다. 시중에 있는 작법서는 거의 읽었으면서 분출하는 질투심과 자기혐오를 잠재울 만한 답을 찾기를 원했다. 저자에서 끝나지 않고 작가라는 상태를 이어나가기 위해 분투한 사람의 궤적을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글을 쓰는 법에 관해, 도무지 글감이 나오지 않아 백지에 엉망진창인 글자만 늘여놓을 때 드는 혐오는 어떻게 멈추는지 알기 원했다. 그때 마주친 제목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였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니, 평소라면 너무 독하다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프롤로그조차 살펴보지 않고 덜컥 샀다. 한참을 집중해 읽는데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저 사람마다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그때를 만날 수도 있고, 죽은 후에야 찾아올 수도 있다. 빠르고 늦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속 써라.
_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2018
머리가 아팠다. 나는 왜 현생이라 불리는 지금 생애에서 성공할 거라 단언했던 걸까. 살면서는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해 빈곤에 시달렸지만 뒤늦게 진가를 알아본 대중에 의해 사후에서야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되리라고 생각을 못했던 걸까. 나는 현생에서 성공이라 여겨지는 때를 만날 수 있겠지만 아쉽게 죽은 후에야 찾아올 수도 있다. 운이다. 꾸준히 노력을 하는데 알려지지 않으면 아쉽게 운이 따르지 못한 거다. 운과 실력이 동반되어 협력 작용을 발휘하면 좋겠지만, 만일 그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라는 걸 간과했다. 이제까지 나는 무조건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성공하리라 자부했다.
돌이켜보면 늘 성공을 목적으로 두었다. 상만 받으면, 문예지에 글만 실으면, 단독으로 책만 내면, 나를 사랑하는 팬 열 명만 있으면, 돈을 내고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기면 그게 성공이라 말하고 다녔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과를 모두 이뤘는데 나는 또 무언가를 바랐다. 출간 직후 이루어지는 중쇄와 몇 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차트를 보기를 꿈꿨다. 막상 베스트셀러에 오르면 다음 책도 그러기를 기원했을 거면서 이번에도 중쇄를 못 찍었다며 홀로 칭얼거렸다. 차트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지면에 공표한 게 무색했다. 욕심과 질투에 시달려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한 명에게라도 함께 살아보자는 진심이 닿으면 되는 책이라 생각했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둘 중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해. 반짝이는 베스트셀러 작가와,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않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찾아주는 팬과 함께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원하는 삶인지에 대하여. 스무 살 적에는 짧고 굵게 사는 게 최고라며 전자를 드높였겠지만 두 권의 책을 내보인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전하며 독자님과 함께 나이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심해에 깔린 욕구를 알아차리니 판매 지수가 바뀌는 이른 아침에 드디어 푹 자겠다는 확신이 든다. 성공에 있어 빠르고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으므로, 사후에 알려지든 할머니가 되어서야 알려지든 그건 글쓰기의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데 있어 나를 가로막는 방해물은 '이것밖에 쓰지 못하냐는 자기혐오'와 '다른 이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시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