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Sep 10. 2022

천천히 사라지겠다는 용기


인턴일 때는, 상사가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으면 했다. 내게는 이런 아이디어가 있다고, 어젯밤에는 브레인스토밍을 위해 저런 레퍼런스를 찾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스물 초반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잘 닿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사람을 찾아 마음을 썼다. 처음에는 얼굴과 나이를 밝히지 않고 글을 썼고, 점차 독자님들이 나를 궁금해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내 정보를 공개했다. 고향은 어디인지, 나이는 몇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오프라인 강의에도 몇 번 참석하며 활발한 성격을 내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번아웃이 왔다. 인스타그램을 하면, 그렇게 떠오른다는 퍼스널 브랜딩을 하면 나아질 줄 알았지만 나는 점차 더 고갈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말을 베풀며 정작 내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아까워 삼켰다. 이사도 했고 이제 노트북을 꺼내 글만 쓰면 되는데 바스러지는 나뭇가지가 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인스타그램 영상만 찾아본다. 어제는 네이버에 올라간 내 프로필을 닫아버릴지 고민했고,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에 절필을 한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올릴까 고민했지만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어서 나는 조금씩 사라지기로 마음먹는다.


지금 값을 내지 않고 5년 뒤 숙박비를 내는 춘천의 따스한 첫 서재에 방문했을 때, 나는 서재지기님께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책만 성공적으로 내면 작가라는 직업을 접고 조용히 직장 생활을 하고 싶어요." 그 마음이 점차 튼튼해지고 있다. 나는 이제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서평과 편지에 일희일비하며 자존감을 오르내리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데 능숙한 척하며 곧 이불을 차게 될 조언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주고 싶지 않다. 나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 굴러가는 하나의 나사이고 싶다.


이전에는 글을 유려하게 쓰는 사람이 존경스러웠지만 이제는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멋져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빛을 내는 사람, 조용히 있지만 그 사람의 향을 맡으러 고요하게 자문을 청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된 나는 용기를 얻는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난 글쓰기 온라인 강의를 오래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지만 이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은 그만하고 싶어서 자리를 내려놓을 준비를 천천히 하고 있다. 그리고 차차 인스타그램을 닫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고, 뉴스레터를 접고, 연이 닿은 작가님들과 간간히 안부만 주고받는 사이가 되겠지.


물론 이러다가 마흔 즈음에 답답함이 고여 도저히 글을 쓰지 않고서는 하루를 영위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키보드에 손을 올릴 수 있다. 필력은 지금보다야 줄었겠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동력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기에 눈을 감기 전까지 오래 쓸 수 있을 테다. 지금은 어리다. 누군가가 성공하면 진심으로 축하하기보다 배가 아프고, 주요 문예지에 글을 올리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고, 따라 나를 잃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아픔을 안으려는 진심이 점차 튕겨나가는 요즘이다. 모든 이를 안으려다 그만 나를 잃어버렸다.


계약직처럼 작가로서 자취를 감추겠다는 기간을 올해로 정해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까지만 이곳저곳에 투고를 하고 다행히 책이 계약되면 묶어둔 글로 책 한 권을 더 낸 뒤 조용히 사라지겠다고 다짐한다. 투고가 번번이 실패되거나 기고가 오지 않는다면 이번 책을 마지막으로 차차 옅어질 계획이다. 누군가는 이런 나의 계획을 듣고 능력이 아깝다고 얘기했지만 글쓰기라는 한 분야에 절박해진 나는, 글이 잘 쓰이지 않기라도 하면 하루를 망했다고 규정짓는 내게는 이제 뒤를 돌아 천천히 나갈 힘이 필요하다. 그간 내가 엮은 두 권의 책을 사랑해준 사람들에게 진심 담아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