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일기를 써야만 했던 그때, 담임 선생님이 일기장을 봐도 아무렇지 않던 그때,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어른에게 칭찬을 받았다. “요아의 일기장을 읽으면 꼭 안네의 일기가 떠올라. 안네가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요아도 요아의 일기장에 이름을 붙여 일기를 써보는 게 어떨까?” 그때 나는 일기에 어떤 이름을 지어주었지, 정작 그건 기억이 나질 않고 선생님께 칭찬받은 일만 떠오르는 걸 보면 열 살의 나는 무척이나 그 순간을 자랑스럽게 여긴 게 틀림없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출전하면 무조건 상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어도, 대회에서 내놓은 글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꾸역꾸역 온갖 백일장 대회에 나갔다. 학교에서 열리는 작은 대회에서는 대상을 받았지만 전국 대회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걸 애매한 재능이라고 불렀다. 애매한 재능, 나는 애매의 ‘애’에 ‘사랑 애’를 붙였다. 글을 향한 마음은 절절하게 불타올랐지만 당장 서울권의 대학으로 나를 보내고 싶었던 선생님들은 도리어 글을 접으라고 했다. 글은 대학 가서도 쓸 수 있으니까 수학을 펴라고. 문예창작과의 실기 전형이 있다는 걸, 어느 지역에는 예술고등학교라는 게 있고 그곳에는 문예창작과라는 학과가 이미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선생님들의 말마따나 문제집을 폈다. 대학에 가면 꼭 글을 써야지, 그 누구도 나를 말릴 수는 없어, 결심하면서.
그 결심은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산산이 깨졌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기 위해, 그러니까 글로 돈을 버는 작가가 되기 위해 국어국문학과에 왔다는 내 소리에 선배가 실소를 터뜨렸다. "국어국문학과는 굶어 굶는학과야." 다른 선배들이 슬픈 맞장구를 쳤다. 기가 죽은 나는 고개를 돌려 동기들을 훑어보았다. 동기들도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국문학과에 다니는 선배들의 반이 복수 전공을 한다는 사실을, 동기들 몇은 이미 편입 이나 전과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부터는 나도 수긍하는 무리에 동참했다. 우리 과는 망했어, 곧 없어질 거야, 아니면 다른 학과와 합쳐지거나. 첨단시스템융합국문미디어학과 같은 명칭으로 굳어져 어쩌면 후배들도 우리를 선배라고 여기지 않을지 몰라. 술잔을 든 친구가 말했다. 나는 미안한 듯 웃었다. 우리 복수 전공 안 하기로 했잖아. 글 쓰는 데 충실하자고. 그런데 나 있잖아, 그냥 하려고. 우리 학과 하나로는 도저히 먹고 살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고르고 고른 건 신문방송학과였다. 적당한 타협이었다. 어쩌면 글을 쓰는 기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감정을 빼고 정직하게 상황을 묘사하는 기사의 성격과 창의적으로 감성적인 이야기를 펼치고 싶은 내 욕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마음을 대번에 알았던 건지 기자셨던 교수님은 내 기사를 읽고 요아는 수필을 써야겠다, 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수필은 문학 시간에 배웠던 어려운 글이었다. 안네의 일기는 흘려듣지 않았으면서 그 이야기는 흘려 들었다. 신문방송학과는 고작 일 년밖에 다니지 않았는데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설된 과목에서 마케팅을 배웠다. 막학기가 되자 이력서를 들고 취업 센터에 갔더니 이 학벌에 마케팅은 무리고 영업을 뛰라고 했다. 말주변이 없던 나는 도무지 영업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마케터가 되겠 다며 주먹을 쥐었다. 글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작은 기업에서 마케터로 취업에 성공했다. 기쁜 건 잠시뿐, 곧 수많은 카피를 구상하고 포토샵을 켜야 했다. 카피를 광고에 돌렸는데 효율이 낮으면 금세 어딘가로 사라졌다. 현요아라는 이름 석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쓴 카피야, 물었을 때 선배가 저요, 하고 답하면 그 선배의 카피로 인정받아서였다. 선배보다 일찍 퇴근했다는 이유로 방을 빌려 욕을 들었다.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돼요, 라며 해고를 당했다. 거기서 겪은 모든 일이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는 건 직장 내 괴롭힘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락 거렸을 때였다. 눈물을 삼키며 친구에게 나, 글로 돈을 벌고 싶어, 내 이름이 적힌 좋은 글을 내보이고 싶어, 아무도 내 글을 고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 말을 하면서 어느 정도는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 암호화폐를 하던 친구는 내게 "글을 쓰면 암호화폐를 주는 플랫폼이 있어. 거기서 글을 한 번 써볼래?"라고 했다. 물론 암호화폐는 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 쓴 글은 취업을 포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속편으로 부당 해고를 당했을 때의 감정을 낱낱이 펼쳤다. 독자들은 나를 후원한다는 뜻의 보팅을 눌렀고 친구의 말대로 정말 그 보팅은 암호화폐가 되어 암호화폐 플랫폼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현금화를 할 수 있었다. 누구의 허락도 맡지 않은 본연의 내 글이 돈을 버는 첫 순간이 었다. 어떤 글은 한 편당 오만 원이 되었고, 어떤 글은 암호화폐 플랫폼에서 대상을 받아 백만 원이 되었다. 그 글을 한데 모아 잡지사에 투고했다. 전국 대학교에 무료로 배포되는 주간지로, 대학 시절 월요일을 기다리게 해 주었던 애정의 잡지사였다. 얼결에 인턴에 합격해 에세이를 쓰는 선배들을 만났다. 에세이스트라는 직업도 처음 알았다. 에세이스트는 기자처럼 시험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오늘 내가 에세이를 쓰면 그게 바로 에세이스트였다. 나는 그 호칭이 좋아 스스로를 에세이스트라고 불렀다. 에세이를 쓰는 선배들을 존경하면서, 동경하면서. 서울이 싫어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글을 쓰면서 월급을 받았다. 내가 쓴 에세이와 기사에 이름 석 자가 달렸다. 아무도 내 글을 제 글로 빼앗지 않았다. 동시에 암호화폐로 돈을 벌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쏠쏠했다.
그대로 가면 좋으련만 인턴은 계약직이었고 암호화폐의 물가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나는 다시 할 줄 아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는 사람처럼 마케터로 눈을 돌렸다. 한편 에세이는 꾸준히 썼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때 받는 힘을 알아버린 탓에 마음을 쓰지 않고서는 몸이 아팠다. 쓴 글은 어느 곳에 올릴까 고민하다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선택했다. 다들 광고가 없어 돈이 되지 않는 플랫폼이라고 했다. 차라리 원고를 모아 출판사에 투고를 하라고 했다. 짐짓 고민했지만 이미 그때는 독자에게 받는 위로와 응원의 댓글을 잊을 수 없었기에 브런치를 골랐다. 신경 쓸 것은 한 가지였다. 정말 내 모든 일을 솔직하게 밝힐 수 있을까. 종종이 아닌 자주 울적해지고, 가끔이 아닌 많이 힘들어지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내보여도 지인들이 놀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에세이를 썼다며 회사에서 잘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래도 써야지, 나는 애매한 재능에 사랑 애를 붙인 사람이니까. 나와 글을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발행했다. 나고 자란 고향인 제주도가 싫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은 에디터의 시선에 밟혀 브런치 공식 카카오톡으로 전달되었다. 무려 오십만 명의 구독자에게 내 글이 배송되는 순간이었다.
발송이 된 직후 물밀듯 사람들이 들어왔다. 조회수 십 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글 한 편 썼을 뿐 인데 그 글이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대표의 눈에 들어 출간 제의를 받았다. 부랴부랴 출간 기획서를 쓰고 이 짧은 한 편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목차를 잡았다. 그렇게 슬리퍼 발바닥까지 뜨거워지는 여름에 첫 책이 나왔다.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 물론 그 책 하나로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다거나 커다란 돈을 만지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열성 독자 분들을 얻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 제안이 왔고, 글을 쓰면 또 제안이 왔다. 지역에서 열리는 글쓰기 강의부터 도박 중독자 분들을 향한 재활 글쓰기 수업으로 돈을 벌었다. 이제까지 좋아하는 일 바깥의 것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충분히 좋아하는 일로도, 그러니까 내게는 에세이로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감염병이 시작됐다. 한둘씩 대면 강의가 줄어들고 모두가 마스크를 꼈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고립감에 내 우울감은 더욱 짙어졌다. 잇따라 같은 우울을 겪던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잃고 비통해하다가 한 달이 지났을 즈음 결연하게 브런치를 열었다. 사람들에게 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일 년간 스무 편의 에세이로 묶인 이야기는 카카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9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상을 받고 달라진 건 의외로 많이 없다. 책이 불티나게 팔리지도 않았고, 방송에 나오라는 연락도 받은 적 없다. 다만 나를 작가로 불러주는 사람들이 늘었을 뿐이다. 에세이를 수입화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았 다. 글을 쓰는 나를 믿어주기 시작하자 공모전에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었다. 배달의 민족이 발행하는 뉴스레터에서 기고 요청이 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투고했고 매생이 굴국밥을 먹는 에세이로 당선되어 십만 원의 배민 상품권을 받았다. 가끔 커다란 파이프라인이 오기도 한다. 유명한 기관의 마음 치유 사업에 스토리텔러로 참여하고, 주요 신문사 잡지에 에세이를 올린다. 그리고 스스로를 에디터로 부른다. 두 번의 인턴과 세 차례의 계약직을 거쳐 잡은 일이 에디터라는 게, 돌고 돌아 내가 하고 싶었던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게 생경해서 나는 자주 웃는다. 다음은 어떤 책을 쓸 수 있을까. 에세이스트는, 작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잡아내는 직업이라고 믿는다.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되짚어 종이 위에 그대로 싣는 직업. 나는 그 직업을 사랑한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을 '애'정한다. 이제 나는 진정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법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