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의견을 나누는 합평을 하기 위해 한 편의 동화를 읽고 갔다. 모두 일에 쫓기느라 단편을 내는 와중에 홀로 기다란 장편을 내셨다. 바쁜 와중에 어떻게 쓰셨냐고 물어보던 찰나 동료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거, 사실 문학상 최종심에서 떨어진 원고예요." 그 문학상은 동화책으로 나오면 불티나게 팔리기로 유명한 문학상이었다. 최종심이라, 말 그대로 예선과 본선을 거쳐 끝의 후보작 중에 하나로 꼽혔지만 아쉽게 탈락했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했다. 최종심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친구는 "그러면 우수상이겠네?"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떨어졌다는 거야. 문학상은 대개 한 명만 뽑거든." 친구는 허탈하게 웃었고 나는 그 최종심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만일 내가 최종심에서 떨어졌다면, 최종심에 올랐다는 사실에 기뻐했을까, 최종심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에 아쉬워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나의 동료가 최종심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에 그리 절망하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내공을 쌓았으면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나는 최종심에 올랐다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없다. 물론 나 몰래 심사위원들이 내 작품을 두고 미주알고주알 토론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접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소식이 다행인지 내 귀에까지 들려온 적은 없다. 그러니 나는 최종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두근거리며 마음을 졸인 적도 없고, 최종심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에 아쉬움의 눈물을 흘린 적도 없다. 다만 비슷한 사례는 하나가 있는데, 세 번째 에세이가 출간으로 이어질 뻔하다가 예상보다 더욱 어둡다는 말에 취소되었을 뿐이었다. 그런 일은 꽤나 비일비재해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물론 아쉽기는 했다. 빛은 어둠이 있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모든 어둠이 피해야 할 종류의 무엇은 아니라고 판단해서였다. 어쨌거나 그때 조금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는 했으니 나는 최종심에 올랐다는 기쁨보다 떨어졌다는 슬픔을 더욱 커다랗게 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취업을 결정짓는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는 편이 최종 원고의 출판을 결정짓는 최종심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이 글을 적는 이유는 한 공모전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서다. 나의 글에 관한 삶을 통째로 옮겨두었을 정도로 열렬히 썼는데, 오랜만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며 사실 그대로를 써냈는데 오늘 혹은 내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떨어졌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번 주 중으로는 연락이 온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루에도 메일함을 여러 번 들락거리고, 문자를 확인하고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진심을 담아 글을 썼다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움직인다고 당선되는 건 아니어서 나는 주눅 들었다가 설레었다가를 반복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모전 담당자에게 연락해 나의 에세이가 최종심에라도 들어갔냐고 묻고 싶다. 최종심에 들지 않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고 싶다. 상식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나는 다시 시무룩해진다.
나를 가르치는 교수님은 글에 관해서만큼은, 특히 글을 내는 공모전에 관해서만큼은 일희일비가 없어져서야 한다고 했다. 혹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여분의 글을 준비해 두면 나는 또 다른 공모전에서 글을 낼 수 있다고, 다른 출판사에 투고할 만한 글감이 충분히 놓여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에세이에 관해서는 브런치에 계속 올려버려서 따로 쓰인 글감이 없는 나는 이 하나의 에세이 공모전을 하릴없이 기다린다. 공모전에 당선되면 책으로도 묶여 나온다고 하던데, 그 책을 꼭 쥐고 싶다. 이렇게 말했다가 다음 날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 토요일에 막내와의 패러글라이딩을 예약했다. 제주 오름에는 비가 온다던데 빗방울을 맞아도 좋으니 훨훨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구름을 줍는 것처럼 글감을 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