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 아들레르는 말했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가며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고. 작년 가을부터 에세이를 쓰고 읽는 모든 일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즈음 들었던 말의 영향이 컸다. 작가님의 글은 같은 말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아 복제적인 성격이 강해요. 하던 말을 또 하고, 지난 책에 썼던 감정을 다시 또 그대로 재현해요. 그 말을 듣고 더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펜을 잡고 책을 내는 그 자리를 모두 아직 글로 해방감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물론 그 이야기는 비밀로 숨겼다. 들어보았자 다들 비슷한 이야기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써 주세요, 요아님의 이야기가 좋아요, 같은 이야기여도 계속 듣고 싶어요, 라는 류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 빤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갑자기 펜을 부러뜨린다면 나도 그 말을 할 용의가 가득했기에 그 말에 담긴 영혼마저 잴 수는 없었다. 순간에는 진심일지 몰라도 곧 휘발될 이야기일 것만 같았으므로 나는 그저 지쳤다는 말로 글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이 왔다.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인 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보다 백스페이스를 누르면 사라지는 글을 사랑하는 나는 언어를 잃은 채로 한 계절을 보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무례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였을 때 변명을 하는 일조차 어려워했다. 마음에 담긴 언어를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해 끙끙 앓았다. 감정을 언어로 내뱉지 못하니 반대로 감정을 살피는 방법조차 잊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는지, 수많은 단어 중에서 어떤 단어와 표현을 골랐는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로 자기소개서만 썼다. 다닐 마음이 없는 기업에도 이력서를 냈다. 한 곳에 붙었지만 오래 다니지 못하고 사직서를 냈다. 자아 복제적인 이야기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자라났다. 다행히 아직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몇 남아 있었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대개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이라고 짚는 쪽의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내일 사라져도 괜찮다는 말을 여러 방향으로 한다. 강의에서는 삶에 애착을 가지라고 떠들면서 집에 와서는 자조한다. 오늘 전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짧게 살고 싶다는 욕구와 조그마한 돈도 저축해서 오래 살고 싶다는 열망이 충돌한다. 삼 일 전에는 창틀에 머리를 찧었다. 아린 부분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니 피가 묻어 나왔다. 놀란 애인이 머리카락을 휘젓고 두피를 자세히 보니 기다랗게 상처가 났다고 했다. 다행히 깊지는 않아 보인다는 그의 말에 그렇다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만류하는 애인과 몇 번 실랑이를 벌이다가 고집 센 내 성격을 잘 안다는 듯 그렇다면 조금만 더 아파져도 병원에 가기로 약속했다. 깊게 찧었어도, 이튿날에 어지러움을 느껴도 병원에 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나갔는데 차마 말하지는 않았다.
상담은 다시 시작했다. 태어나 아홉 번째로 만나는 선생님이다. 어떤 선생님과는 대판 싸웠고 어떤 선생님과는 상상만 해도 애틋한 기분이 들 정도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번 선생님과의 관계도 괜찮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힘을 내라거나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방향을 틀자고 말했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방향을 틀자는 뜻으로. 선생님, 그런데 저는 무기력에 가까워요. 무기력이라는 건 기력이 없다는 뜻이니까 애초에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에너지라는 게 없는 게 아닐까요. 선생님이 웃었다. 애초에 무기력이라는 게 왜 나타났나요. 이전에 기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래요. 그러니까 무기력은, 에너지가 고갈되었다기보다 에너지를 깔아뭉개는 편에 가까워요. 정말 에너지가 없는 사람들은요. 힘없는 채로 살아요. 그저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상담을 받으러 오지조차 않아요. 관련된 책과 글을 읽지도 않고요.
그래, 나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내 몸과 마음을 통로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정작 나는 원래 내 이야기만 떠벌거리는 사람이 아님에도 몇몇의 이야기만 듣고 나를 계속 같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지었다. 애초에 같은 말을 계속 떠들어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충분히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언어와 표현 방식을 사용해서, 여러 사례와 직접 본 이야기를 기억해서 나누면 될 텐데 나는 자기복제적인 에세이만 쓰니 이 장르는 영원히 읽지도 않겠다며 울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바깥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안의 이야기를 꾸준히 쓰고 싶다. 물론 내 안의 이야기가 고갈되었을 때야 밖을 몇 번 두리번 거리겠지만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고 싶다. 그렇다고 나만을 위한 글은 쓰지 않겠지만. 이 몇 가지의 다짐만 염두하면 어쩌면 나는 아무도 읽지 않아도, 애인 한 명만 읽어도 괜찮은 수필을 쓰다가 잠들 수 있을 테다. 기쁘고 충만한 기분으로. 이대로 괜찮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