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다. 그렇지?
치앙마이에 간다면 노스게이트는 꼭 들러야 한다는 동료 작가님의 말이 떠올라 그날 밤은 재즈펍으로 향했다. 올드타운에 위치한 노스게이트 펍 속 맥주병 대신 코카콜라병을 든 애인이 샐쭉였다. 나 역시 지금 들리는 재즈가 황홀하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실시간으로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가 너무나 웅장해서 외쳐봤자 그에게 들릴 턱이 없었다. 결국 클럽에서 낯선 사람과 손짓으로 대화하듯 그렇다는 의미로 엄지를 추켜올렸다. 숙소로 가는 길에 그는 치앙마이에서의 여행기를 에세이로 담는 건 어떤지 물었다. 산꼭대기에서 탄 아슬아슬한 짚라인과 향신료 가득한 태국 음식, 오렌지 주스에 샷을 추가한 상큼한 오렌지 아메리카노의 추억을 글로 오랫동안 보관해두면 어떻겠냐는 의미였다.
대체로 애인의 말이라면 쉽게 응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여행지에서까지 에세이에 쓸 글감을 찾으면 뇌가 너무 뜨거워질 것 같다는 답을 내놓았다. 짚라인을 탈 때는 산기슭으로 가득한 초록 풍경에만 집중하고 싶었고,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의 맛에만 몰입하고 싶었다. 이 맛과 풍경과 기분과 느낌을 어떻게 한 편의 에세이로 완성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되짚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빠르게 복기할 수 있는 비결은 그때의 그 찬란한 장면을 오롯이 만끽했기 때문이다.
불과 오년 전만 하더라도 글감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겪은 모든 일을 쓸 수 있었다. 기억력이 좋았던 게 한몫했다. 지금의 나는 여러 개의 일을 동시에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소설을 쓸 때는 소설에만 집중하는 게, 글감을 찾을 때는 글감을 찾는 데에만 집중하는 게 편하다. 그러니 여행지에서의 기록을 일기장에도 쓰지 않는 건 여행지에서의 생생한 순간을 그대로 담기 위해서다. 카메라도 잘 켜지 않아 사진이라곤 스크린샷이 대부분이다. 여행이 끝난 비행기 안에서 킬킬대며 뒤적일 사진과 글이 없어 때때로 아쉽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다.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기록하지 않고 휘발하는 건 띄엄띄엄 떠오르는 나의 머릿속을 믿어서다. 긴 시간이 흘러 우연히 어떤 상점에 들어섰을 때, 이곳은 마치 치앙마이 님만해민에 있는 작은 소품샵 같았다고 느끼는 나와 살면서 먹어본 신기한 과일이라는 주제로 대화할 때 슈가애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 맞아, 그런 날이 있었지. 무덥고 무더워 하루에 카페를 네 곳이나 다니던 하루.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전 세계를 쏘다니는 여행 작가가 되기를 손꼽던 학생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어이없어할지 모르겠다. 쌈짓돈을 모아 힘들게 떠난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름만 하릴없이 바라보는 내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얼른 한 페이지라도 적으라고 외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지에서는 여행에만 몰두한다. 글쓰기 장비인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키보드는 집에 고이 모셔두고 옷가지와 생활 용품만 든 간소한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라탄다. 일요일에만 열리는 선데이 마켓에서 파는 기념품도 손에 들이지 않는다. 애인은 그런 내게 왜 아무것도 사지 않느냐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괜찮아, 하고 짧게 답하고서는 나시 원피스 두 벌을 두고 어떤 걸 살 지 고민하는 무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결국 두 벌을 갖기로 결심하고 기쁜 표정으로 원피스를 사는 이를 바라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황금색 사원 끄트머리로 붉은 태양이 천천히 저물며 구름을 다홍색으로 물들였다. 오늘 어치의 기록은 이렇게 오늘로 끝을 맺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