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드라마를 챙겨 보는 일
억울하거나 화가 나는 일을 겪을 때마다 두 가지의 선택지에서만 빙빙 돌며 고민했다. 싸우느냐, 도망치느냐. 맞서 싸울 재간도 용기도 없어서 밤새우며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끔 모두 도망을 택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시간을 돌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대도 맞서 싸우지 못할 게 빤해서였다. 걸출한 인재를 내보였다고 자랑하는 자기 계발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친목 계발 동아리였을 때는 오만 원이라는 입단비가 아까웠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 어렵사리 입사한 인턴 시절에는 상사가 꼬박꼬박 내 글에 자기 이름을 달아 꼭 자신이 쓴 것처럼 내보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호소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나도 모르게 저 깊은 속내까지 구태여 줄줄이 꺼내어질까 봐 조용히 사직서를 냈다. 도망치는 건 여전히 현명해 보였다. 억울함은 비록 풀리지 않을지언정 갈등과 높다란 언성으로부터 멀어졌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번에는 달랐다. 자주 사담을 나눌 만큼 믿었던 동료가 뒤에서 내 이야기를 좋지 않게 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성실히 쓰겠다고 사비로 장만한 회사용 키보드를 가방에 담으면서, 퇴사한다는 메시지만 남기고 그 이상의 이유는 꺼내지 않는 나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한 감정에 빠졌다.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당장 어제만 해도 연신 마우스를 누르던 내가 다음 날 사무실에서 가방을 싸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언제까지 도망만 칠 것인지 시기를 알 수 없어 아득한 기분만 가득했다. 인턴 시절 겪은 사건처럼 저 사람이 내 글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고,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시킨다고, 원래 시키기로 했던 일 밖의 자잘한 노동으로 나를 이용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인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고 괜한 지인에게 분출됐다. 사적인 관계마저 뜻대로 흐르지 않으니 지인에게 먼저 화풀이를 한 나를 탓하게 됐다. 이불 안에서 둥그렇게 몸을 만 나는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반대로 나를 싫어하는 마음은 성큼 올라왔다.
어떤 사람은 참는 게 미덕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표현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낫다는 이야기를 해서 당최 어느 쪽이 답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을 끓게 만들도록 나를 미워하는 마음은 이곳저곳에 내보이면 결국 자책으로 돌아올 테니 이왕이면 나를 괴롭힌 타인에게 화살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개인 계정에 저격을 하는 글을 올렸다. 뒤에서 이상한 말을 지어내는 건 백 번 생각해서 이해하겠는데, 글까지 몰래 가져다 쓰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게 요지였다. 처음에는 내 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지만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도용을 보자니 안쓰러울 지경이라는 내용도 담았다. 실시간으로 글을 읽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글은 올리지 않는 게 너를 위한 결정일 것 같다는 다정한 말이었다. 맞는 말이어서 바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글을 지웠으니 더는 퍼지지 않을 테고, 퍼지지 않을 테니 나는 내 이미지를 지켜낸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나를 싫어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친구도 아는 당연한 사실, 그러니까 충분히 개인적으로 오해를 풀 수 있을 텐데 굳이 잘못을 공개적으로 꼬집어 깎아내리는 이는 되지 말자는 나의 규칙이 깨진 순간이었다.
면접을 보면 늘 짧은 경력이 문제로 꼽힐 만큼 모든 회사로부터 도망쳤다. 퇴사 사유는 제각각이었다. 책을 내야 하는데 글 쓸 시간이 없어 직장을 나온 사유가 가장 이상적이었다. 반듯하게 지어낸 사유가 아닌 실제로 퇴사한 사유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정치를 하기 시작해 도망쳤고, 대표가 나를 예뻐한다며 나를 시기해 괴롭히던 동료가 싫어 도망쳤고, 아침에 깜빡해 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로 방을 빌려 세 시간 동안 예절을 가르치던 상사를 보는 게 괴로워 도망쳤다. 고향인 제주가 싫다는 첫 책에서는 무거운 왕관을 써서 척추에 힘을 주는 대신 이왕이면 가벼운 왕관을 찾아 헤매겠다는 내용의 꼭지도 쓴 적이 있을 만큼 도망은 내게 커다란 가치관이었다. 잘못이 아닌 사안으로 된통 혼을 당했을 때, 친구가 나의 행동을 보고 혼자 오해했을 때, 혹은 내가 친구의 행동에 섭섭함을 자주 느꼈을 때도 차단과 절교라는 이름으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도망이 마음을 전부 편안하게 해 주었느냐 하면 아니었는데, 이유를 찾자니 답이 나왔다. 나는 해결하고 자리를 박찬 게 아니라 문제를 덮어 놓고 도망치는 쪽이었던 거였다.
도망치지
말아야 할 때
매번 도망만 가는 내가 너무 싫어서, 그건 당신의 잘못이라 또박또박 외치지 못하는 내가 못마땅해서, 그러다 쌓인 화를 건강하게 풀지 못하고 애정하는 친구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 내가 미워서 머리를 싸매다가 공연히 티브이를 켰다. 자극적인 맛 하나 없는 심심한 드라마로 마음을 다스리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확신했다. 싱잉볼을 듣는 방법과 잔잔한 클래식을 듣는 방법도 있었지만, 눈을 감고 몇 번 해보려니 어둠 사이로 못난 모습이 떠올라 사색에 도통 집중할 수 없었다. 리모컨을 잡고 드라마를 후루룩 내리는데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는 드라마가 보였다.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였다. 찾아보니 잡지의 미래를 고민하던 시절 강렬한 힘이 되어준 ⟪중쇄를 찍자!⟫의 각본가 노기 아키코가 쓴 후속 드라마였다. 각본 실력에 신뢰가 쌓인 나는 줄거리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첫 편을 누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마지막 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조한 취업률 속 바늘구멍을 뚫고 입사하고 싶은 주인공이 관점을 바꾸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이야기였는데, 종종 아르바이트로 임하던 집안일을 아예 직업으로 바꿔버리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월급을 주시면 집안일을 해드릴 테니 우리 함께 살아봅시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다음 화를 누를 수밖에 없어 자꾸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다 보니 금세 마지막 화에 도착한 거였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대사는 계약 결혼을 수락한 남편의 입에서 나왔는데, 처음에는 속담을 운운하며 "도망치더라도 괜찮지 않아요? 헝가리에 이런 말이 있어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쉬운 길을 택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도망치는 게 부끄럽긴 해도,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해요."라고 속상해하던 주인공을 안심시키던 계약 남편이 나중에 직접 도망가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때 그는 도망치던 와중 멈추어 생각한다. "도망치는 게 부끄럽더라도 살아남는 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잘못됐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칠 순 없다. 그 사람을 잃기 싫으면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만 먹먹해지고 말았는데, 도망쳐도 괜찮을 때와 도망치지 말아야 할 때를 또렷한 눈빛으로 분명하게 읊는 표정에 압도되어서였다. 뒤돌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일시 정지를 눌렀다. 나 역시 도망쳐야 할 때와 도망치지 말아야 할 때를 명확하게 짚어야 했다. 애정하는 동료에게 서운함이 쌓였다면 갈등이 두렵다면서 관계로부터 달아날 게 아니라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어 대면하는 게 중요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소문이 맞냐고, 만일 내가 들은 사실이 맞다면 어떤 이유로 퍼뜨린 거냐고 차근차근 대화의 물꼬를 틀 준비를 해야 했다. 덮어놓고 비행기를 탄 뒤 먼 나라로 떠날 일이 아니었다. 채 풀지 않은 실타래는 여전히 내 발목을 감쌌으므로 그 실타래의 시작점을 알아내야 했다.
결심했다. 나를 도망의 갈림길로 다시금 밀어 넣은 일과 부딪히기로. 이번에는 상담 연장을 위해 심리 상담 선생님께서 쓰신 나의 소견서가 문제였다. 내 상태를 기록한 종이에는 '비만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이 있음'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 문장을 본 후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점차 또렷하게 나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늘 나를 예쁘다고 해주는 선생님께서 그런 글을 썼으니 더는 선생님을 보고 싶지 않아 상담을 아예 포기하려 했다고 말하는 상상을 바쁘게 했다. 그제, 커다랗게 낸 용기를 데리고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그건 너무 했어요. 소견서 말이에요. 비만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고 표현하신 건 제게 상처였어요." 당황한 선생님은 애써 웃어 넘기려는 나를 향해 빠르게 어느 종이를 꺼내보였다. 종이에는 삐뚤빼뚤하게 쓴 내 글씨가 있었다. 비만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 상담을 받고 싶어요. 상담을 시작하기 전 내가 직접 쓴 글이었던 거다. 선생님은 소견서 마감일에 맞춰 빠르게 쓰느라 나의 글을 따라 썼다며 사과했다. 나는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나를 만나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선생님께 도리어 내가 죄송하다는 대답을 하면서 온갖 감정에 휩싸였다.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갈등에 부딪히면 싸우거나 도망치는 방법, 두 가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만나서 오해를 풀고 화해하는 방법도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살아가면서 이 방법을 늘리기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느릿하지만 똑바르게 푸는 법의 갈래를 넓혀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좋은 어른이란 이런 방법을 익히고 갈래를 만드는 사람일 지 모르겠다고. 아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고 정정했다. 이렇게 어느 드라마에서 인생을 배운 나는 또 하나의 드라마를 찾았다. 오늘 밤은 ⟪고독한 미식가⟫,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