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림 그리는 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때는, 좋아하는 것이 때로 싫어하는 것으로 변할 수 있고 분명 싫어한다고 단언한 것이 점차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다섯 살부터 시작한 피아노를 그만두고 붓을 잡으면서부터였다. 부푼 볼로 멜로디언을 치던 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 학원으로 직행했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음계조차 읊지 못했던 나는 눈 감고 쇼팽을 칠 만큼 꼬박 팔 년 간 건반만 눌렀다. 그러다 피아노 앞에 앉아 흐르는 눈물만 닦던 어느 날 학원을 그만뒀다. 피아노를 그만두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엄마의 질문에 번뜩 그림이라고 답했다. 상상에만 머물던 나의 세계를 하얀 백지에 펼쳐 보이는 그림이라는 장르가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옷이 물감으로 얼룩덜룩해지는 게 싫어서, 손가락 사이사이에 흑심이 묻는 게 싫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랬다.
한아름 기대를 품고 들어간 미술학원에서는 세모만 왕창 그렸다. 세모가 끝나면 네모를, 네모가 끝나면 동그라미를, 동그라미가 끝나면 식탁 위에 놓인 사과와 꽃을 보며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야 했다. 수업을 들을 때는 막상 말하지 못했지만 실은 그 모든 게 나와는 맞지 않았다. 나는 빨간 사과 대신 날아다니는 용 모양의 구름을 그리고 싶었고, 국화 대신 줄넘기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는 아이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미술학원을 꼬박 이 년 동안 다니면서 배운 기술은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는 법이었다. 지금은 학생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만, 내가 미술학원을 다녔을 때만 해도 실물과 비슷하게 그린 사람이 잘 그렸다고 인정받곤 했다. 따라 그리는 것이라면 나의 그림 실력은 이전보다 훨씬 늘어난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칭찬이 늘지는 않았다. 나를 뛰어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다.
매일 재능과 노력과 실력과 운을 점쳤다. 같이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오래 치던 피아노를 왜 그만뒀냐고 물으면 지긋지긋해서라고 답하곤 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달랐다. 작은 방문 밖에서 들리는 친구의 그랜드피아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잘 치는 친구들만 그랜드피아노에 손을 올리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슬펐고, 매일 그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림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늘 밀려나는 쪽이었다. 잘 받으면 장려상이었고, 대체로 참가상인 연필 몇 자루를 쥐고 대회장을 나왔다.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핑계로 미술 학원을 그만두면서 생각한 것은 이런 거였다. 좋아하는 세계에 몸을 담그면 자꾸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다는 걸, 차오르는 그 마음은 가만 두었을 때 질투로 변한다는 걸, 누군가를 온통 시샘하는 쪽으로 변한 마음을 방치하면 좋아하는 것조차 잘하지 못하는 나를 미워한다는 걸. 더는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걸, 그러니 다시는 예체능을 기웃거리지조차 않겠다고.
평소 일기를 자주 쓰니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권유를 애써 무시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당연히 나보다 잘 쓰는 친구가 나올 테고, 그러면 나는 그의 글과 나의 글을 한 줄씩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진다. 그림과 피아노라는 세계를 한 차례 겪었으니 더욱 쓰기 꺼려지는 수순이었다. 당장 서점을 가도 나보다 잘 쓰는 사람들의 책이 책장에 수두룩 꽂혀 있다. 심지어 예체능은 인기를 얻어야 하니 스타성까지 겸비되어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평범하디 평범해서, 흔하디 흔해서 그런 인기 작가의 축에는 결코 끼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섰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마음을 문장으로 엮는 게 속이 편안해서 계속해서 쓰고 있지만, 다행히 산문과 수필이라는 내게 맞는 장르를 찾아 피아노를 친 만큼 적으며 꿋꿋하게 갈 수 있다고 확신하지만 요즘에는 그 확신이 흔들린다. 나보다 잘 쓰고 스타성 있어 인기까지 많은 작가들이 눈에 든다. 북토크를 할 때도 말꼬리를 흐릿하게 맺는 나와 다르게 분명하고 똑똑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하는 멋진 작가들이다. 낡은 갈색 피아노가 든 방문으로 들어오던 웅장한 그랜드피아노 소리처럼, 나보다 더 괜찮고 멋지고 훌륭한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점점 작아진다. 좋아하는 걸 잘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면 다른 작가의 글을 훔쳐본다. 문장과 소재와 표현을 몽땅 훔치고 싶다는 욕망을 잠재우느라 바빠진다.
좋아하는 걸
잘하지 못한대도
책을 읽으려는 목적으로 패드를 샀더니 친구가 앱 하나를 추천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는데, 이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로는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앱이었다. 원하는 질감의 붓으로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색상도 편하게 칠할 수 있고 층을 나눌 수 있었다. 고양이를 그린다면 귀 한쪽 코 한쪽을 따로 떼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개를 쓰지 않고도 층 하나를 빼면 그만이었다. 마케터로서 여러 툴을 쓰는 나는 그 점이 굉장히 편해 보여 값을 보지 않고 앱을 샀다. 비싼 돈을 주고 샀으니 이참에 이모티콘도 만들고 취미로 그림도 그려보겠다고 다짐하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입시 미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쳤던 과거가 스쳐서 열지 않았다. 그 앱을 열어서 처음 그림을 그린 건 앱을 추천한 친구가 그림을 잘 그리고 있냐고 물어봐서였다. 애써 추천해 줬는데 막상 쓰지 못하고 있다고 답하면 상대방이 무안해질까 봐 그렇다고 답했다. 거짓말은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너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하다는 친구의 말에 덜컥 패드가 집에 있으니 집에 가서 보여주겠다는 말을 해버렸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신발을 벗고 부리나케 패드를 켰다. 흰 백지에 창문이 달린 집을 그려보기도 하고, 철 지난 사과를 그려보기도 하고, 고양이를 그려보기도 했지만 전부 성에 차지 않았다.
문득 따라 그리는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그림을 앱으로 불러왔다. 차곡차곡 쌓인 그림들의 투명도를 낮게 조절하고 그 위에 새 층을 덧대어 붓으로 섬세하게 따라 그리자 금세 집중이 됐다. 양갈래로 머리를 딴 여자의 얼굴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누군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건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그리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친구에게 보내면서 잠시 웃었다. 친구를 속인 것 같아서 난 웃음이기도,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집중한 내가 기특해서 난 웃음이기도, 그림을 그리며 나보다 잘 그린 그림을 떠올리지 않아 스스로가 대견해 난 웃음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러 그림을 저장했다. 복슬복슬한 강아지부터 턱을 괴는 남자와 풍선을 든 아이까지, 사진이더라도 그림으로 가까스로 그림으로 소화할 수 있으므로 마음에 드는 장면을 포착했다. 완성된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띄엄띄엄 개인 계정에 올렸다. 보고 그린 그림이었지만 꽤 마음에 들었고 사람들도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칭찬을 보내주었다. 문득 처음으로 무엇을 따라 그렸을 때 칭찬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몸체가 커다란 티브이에는 화면을 잠시 멈추는 일시 정지 버튼이 있었는데, 그 버튼을 누르고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한참 그리고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엄마는 정말 네가 그린 게 맞냐며 한참을 물어보았고, 정말 내가 그린 거렸다는 소리를 듣자 엄지를 추켜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 위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는 실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미울 때, 글을 쓰지 못하고 다른 작가의 글과 내 글을 시시각각 비교하며 낙담할 때 뜬금없이 앱을 열어 그림을 그린다. 왠지 눈에 밟히는 장면을 불러와서 그 위에 선을 슥슥 덧댄다. 그림을 좋아할수록 글을 쓸 때처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지만 요즘에는 단순히 잘하는 것보다 몰랑하게 대충 그린 그림도 사랑받는 세상이라 작가의 특색과 꿋꿋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은 누군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지만 이렇게 많이 그리다 보면 내가 원하는 나만의 화풍이 생겨날 거라 상상하면 조금 기뻐진다. 그러면 그 기쁨을 얼른 잡고 내가 좋아하고 가장 잘하고 싶은 글의 세계까지 옮긴다. 돌이켜보면 잘 그린다는 표현은, 어떤 걸 잘한다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이야기인데 그 사실을 간과했다. 누군가에게는 화려한 수사가 많은 글이 잘 쓰인 글처럼 느껴지고, 어떤 이에게는 감정을 절제해 담담하게 쓰인 글이 잘 쓰인 글이다. 한 사람이더래도 시간에 따라 예전에는 저 글이, 요즘에는 이 글이 더 잘 쓰인 글처럼 느껴질 테다. 이토록 변화무쌍한 정의라면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될 텐데 괜한 사람들을 시샘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좋아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게 분명하다. 나는 요즘 이 작가의 글에 꽂혀서 이 작가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내년에는 저 작가의 글에 꽂혀서 저 작가처럼 되고 싶다는 아쉬움이 물밀듯 흐르겠지만 그 마음 역시 너무나 그 분야를 좋아해서 일어나는 당연한 마음이니까 타인의 재능을 칭찬하는 동시에 나의 재능을 의심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느낀다. 어찌 보면 무얼 잘하고 싶다는 건 그걸 좋아한다는 거고, 좋아하는 게 아직 싫어하는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아직 나는 이걸 좋아한다고 기쁘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잘이라는 건 사람 따라 시간 따라 다른 정의이지만 꾸준하다는 시간의 개념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흐름이므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해 쓴 이 글도 무척이나 빠르게 쓰인 것 같지만 독서실과 카페를 전전하며 썼다. 좋아하는 걸 잘하는 것보다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면, 꾸준하게 이 글을 마무리한 오늘만큼은 나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왕이면 내일까지만이라도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찾아오지 않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