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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Sep 30. 2023

집에 가자

인테리어 앱으로 취향 어린 방을 저장하는 일


7.



  화재경보기가 울리는 소리에 소스라치며 깼다. 막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급하게 지갑을 챙기고 문을 열었는데 복도가 고요했다. 소란스럽지 않은 복도 풍경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단체 메시지방에 들어갔다. 때때로 주민들에게 동네 맛집이나 괜찮은 반찬가게 같은 정보를 얻는 곳이었다. 실시간으로 “대피해야 하나요?”라는 메시지가 화면을 꽉 채울 만큼 올라오다가 이내 한 분의 질문에 조용해졌다. “관리소장님, 설마 이번에도 누수 때문인가요?” 경보기는 몇 분 울리다 꺼진 상태였다. 관리소장님의 답장이 올라왔다. “경보기가 작동한 이유를 파악해 보겠습니다.”


  불빛 하나 없이 기묘하게 어둑한 건물을 향해 소방차 몇 대가 도착했다. 소장님의 “화재는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읽고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밤을 지새웠다. 들어보니 내가 이곳으로 이사하기 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다들 성급하게 문 밖을 나서기보다 잠잠하게 상태를 파악했던 게 아닐까. “이러다 진짜 불이 나면 어쩌시려고요?” 어느 주민이 따지자 저마다 고충을 토로했다. 주로 경보기가 울리게 된 원인인 누수를 제대로 탐지하라는 내용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린 비에 습기가 차올랐고, 잇따라 민감한 경보기를 건드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다. 꿉꿉한 장마철에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해 소방대원들의 진이 빠진다는 기사를 읽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이사를 가야 하나 머리가 아파오면서, 수많은 집 중에 왜 이 집을 덜컥 계약했는지 스스로가 싫어졌다. 오래 살 목적으로 들인 큼지막한 가구들에 괜한 눈총이 튀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허락 없이 고른 집조차 나를 괴롭게 하니 누구를 탓하지도 못했다.


  언제나 집을 보는 눈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튼튼한 집을 고를 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늘 엄마의 지원을 받아 월세를 냈으므로 벌레가 나타나지 않고 물이 새지 않는 저렴한 지상층의 집을 구할 수 없었다. 집은 내게 있어 엄마가 사준 스마트폰과 다를 게 없었다. 다달이 입금해 주는 엄마 덕분에 정기적으로 돈이 나간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엄마가 내주기 때문에 차마 불평 못할 지점도 있었다. 잔고 사정에 맞춰 산 스마트폰이기에 고장이 나도 할부가 끝나기 전까지 함부로 바꿀 수 없듯 집도 마찬가지였다. 천장에 곰팡이가 슨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고개를 오른 뒤에도 또 한참을 걸어 올라야 하는 옥탑방이라고 해서, 창문에 뽁뽁이를 붙여도 냉기가 벽지를 넘어 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되는 집이라고 해서 멋대로 이사할 수는 없었다. 등록금을 아껴주었으면 한다는 엄마의 말에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이 생겨 학업과 관련된 일에만 모든 여유를 내었다.


  내내 엄마가 고르고 엄마가 값을 치르는 방에 사는 기분을 느끼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집이기에 되도록 해가 질 때쯤 집에 들어갔다. 수업이 일찍 끝났으니 곧장 집으로 달려가겠다며 즐거워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에게 집이란 간신히 몸을 뉘이는 침대에서 그치는 공간이 아닌 마음을 뉘이는 아늑한 안식처였을 테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골치를 앓던 바로 아래층 주민은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건 이 집을 포함한 건물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 같았다. 거의 처음으로 온전한 나의 힘에 기대 살아가는 집이었는데 이조차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두통약 몇 알을 삼키고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무엇보다 큰 책상을 옮기려면 이사 업체를 불러야겠지 고민하다가 과거의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렴하게 올라온 청년 주택이라고 바로 계약하지는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 후회한다고 과거가 바뀔 일도 없는데, 꼭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느끼면 그 선택을 한 나를 가차 없이 미워했다. 후회가 치닫자 급기야 본가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다시 내 힘으로 집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 꼬박 한 달을 고민한 모니터도 팔아 치우고 싶었고 햇볕을 맞으며 책을 읽을 요량으로 산 조그만 소파도 처분하고 싶었다. 전세 대출을 받아 집을 구할까 싶다가도 전세금이 떼일까 전전긍긍하던 지난 내 모습을 떠올리면 역시나 본가로 향하는 게 맞는 선택 같았다. 가족과의 잦은 충돌로 고향에 갔을 때조차 따로 월세방을 구했던 기억이 재차 나타나자 그냥 캠핑카에 올라타는 게 정답인가 싶었다. 문득 편안한 집에서 아무 고민 없이 드라마를 볼 사람들이 부러웠다. 익명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느새 나는 그들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파묻혔다.


집에
가자


  손바닥 만한 창문이 달린 고시원에 살 때는 틈만 나면 부동산 사이트를 뒤졌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함께 고시원에 사는 단짝도 부동산 사이트를 보는 게 취미랬다. 부동산을 본답시고 몇십 억짜리 아파트의 시세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보증금 오백만 원, 천만 원만 모이면 옮길 수 있는 현실과 가까운 월세방을 찾았다. 엄마 몰래 과외하며 번 돈으로 보증금을 모았을 때 발품을 팔아 불법으로 증축한 작은 옥탑방을 구했다. 옆집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가 들리지 않아 기뻤고, 화장실에 제대로 된 문이 달려 뿌듯했다. 벽지와 어울리는 이불을 고르고 은은한 스탠드 조명을 들인 때는 전입신고를 한 날이었다. 나도 어엿한 서울시민이야, 하고 세 평 남짓한 방에 친구 셋을 초대한 기억이 불쑥 나면 괜스레 부끄러우면서 흐뭇하다.


  몇 차례 집을 옮기는 과정을 겪을 때마다 마음에 드는 집이 바뀌었다. 옥탑방에 살 때는 일층에 사는 게 꿈이었는데, 막상 일층에 살 때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담배 냄새를 피해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하나뿐인 창문인데 그 창문마저 손바닥으로 가려지는 집에 살았으니 밖이 훤히 보이는 통창으로 가고 싶었다. 나름 통창이면서 일층이 아닌 전셋집을 계약하고 나서야 부동산 사이트를 염탐하는 일을 그만뒀다. 대신 새롭게 나타난 취미가 있었다. 남들이 저들의 취향을 가득 묻혀 꾸민 인테리어를 보는 거였다. 가파르게 오르는 서울의 집값과 움직일 기미 없는 나의 소득으로 보건대 좋은 집을 가는 건 불분명해 보였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집에 사는 대신 나만의 좋음을 담은 집으로 꾸미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찌나 저렇게 금손인지, 혼자 벽지를 발랐고 뚝딱 가구를 조립했다. 나도 이대로 있을 수 없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가벽을 만들었다. 투룸에 살 수 없다면 투룸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냐는 자신감으로 만든 가벽이었다. 얼기설기 세워진 벽을 통통 두드리며 한참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맞아, 어떤 집이든 완벽하게 마음에 들 수는 없어. 언젠가 우리 집 천장에도 물이 떨어진다면 그때 가서 대처해도 돼. 만약 불안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이사를 준비해도 늦지 않아. 마음을 다스리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앱에 들어가 백 가지가 넘도록 저장해 둔 방의 목록을 훑었더니 요동치던 마음이 천천히 차분해졌다. 버섯 모양의 조명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나뭇결이 돋보이는 널찍한 식탁을 가지고 싶다는 것, 그밖에 창문 밖으로 강이나 숲이 보이기를 바란다는 속마음을 느릿하게 살폈다. 새롭게 나타난 방 사진을 둘러보다가 어느 방에서 한참 눈길을 두었다. 세 평 남짓한 방에 아쉬워하지 않고 포스터부터 엽서와 자석을 빼곡하게 붙여 알록달록하게 꾸민 방이었다. 이름 모를 그의 열정에 덩달아 내 열정도 피어올랐다. 어떤 집에 살고 싶다는 건, 어떤 집에 살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건 그만큼 찾아올 미래를 기대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구현할 수 있는 적정 선에서 몇 가지의 가구를 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에 살던 집에는 책상에서 밥을 먹고 글을 썼으니 이번에는 작업용 책상과 식사용 식탁을 따로 둔 것처럼.


  이번 집을 고른 결정적 이유는 이 집이 계단을 밟고 오르내릴 수 있는 복층이어서였다. 침대 하나로 꽉 차는 방에 살았으니 침실을 나눌 수 있는 복층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나는 천천히 원하는 청사진의 집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먼 훗날, 그게 예순이든 여든이든 간에 나는 통나무집에 살 예정이다. 어느덧 귀여운 할머니가 된 나는 벽난로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가만가만 책을 매만진다. 그러고는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깜찍한 상상에 빠졌다가 돌아왔을 때 현실의 방에 주눅 들지 않는 씩씩함이다.


  제주에 오래 살았듯 서울과 부산에서도, 언젠가는 런던의 풍경이 고스란히 보이는 빌딩에서도 스위스의 산이 보이는 작은 마을의 주택에서도 지낼 계획이니까 이 집에 사는 것도 나의 경험이라는 마음을 장착한다. 비록 화재경보기가 틈틈이 울리는 집에 살아 조금은 초조해지지만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해 동네를 괜히 빙빙 도는 나는 이제 없으니까, 추석이라 훌쩍 뛴 비행기값에 못 이겨 서울에 남았다고 홀로 집에 외로이 갇힌 기분을 더는 느끼지 않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됐다. 꼭 고향이 아니어도 어느 장소든 내 집으로 만들 용감함을 지녔으니까 충분하다. 앱에 빼곡하게 저장된 방 소개 사진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취업한 덕분에 처음으로 독립했다며 “제 집을 소개할게요!”라고 적은 사회초년생의 평범한 문장이 유독 귀여워보였다. 특히 벽에 달린 국자와 집게가 시선을 끌었다. 보이지 않는 부엌의 어느 구석조차 알뜰히 쓰겠다며 벽걸이를 달았을 그의 부지런한 몸짓이 연상됐다. 그대도 나도 집에 가자. 풀리지 않는 설명서를 한 손에 든 채 땀을 흘리며 빚었을 우리의 집으로. 몸만 뉘이는 집이 아닌 마음까지 뉘이는 집으로. 우리,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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