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에 맞춰 고른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일
글렀다. 자그마치 여덟 시간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깜빡거리는 커서를 노려보다 노트북을 닫았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부터 이토록 집중력이 흩어졌는지 헤아려봤더니 희미하게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손가락을 내리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짧은 영상이 유행하기 전에는 어떤 일이든 예열 작업 없이 금세 파고들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처럼 할 일을 두고 헤매느라 시간을 흘려보내지는 않았다. 소설을 쓰기 전, 머리를 말랑하게 만들겠다며 켠 스마트폰으로 아이돌 그룹의 신곡 챌린지 영상을 구경하는 모습은 없었다.
요즘 나는 영상을 꼬박꼬박 챙겨 보느라 정작 보내야 할 답장은 미룬다. 바라는 직무의 채용 공고를 찾아놓고서는 자기소개서 란을 열기 전에 반사적으로 영상을 튼다. 절로 움직인 손가락을 따라 끊임없이 짧고 강한 도파민으로 나를 이끈다. 자그마한 화면에 오밀조밀 모인 사막 여우와 미어캣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순간 이동한 시각을 확인하고 황급하게 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스마트폰을 하는 바람에 써야 할 산문의 주제만 간신히 정하고 막상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오늘이 마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며 생각했다. 종일 짤막한 영상만 소비하며 지내면 안 될까? 열흘 뒤 내야 할 월세만 없었더라면 정말 그랬을지 모르겠다.
“영화 볼래?”라는 데이트 초대에 고개를 저은 이유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기다란 호흡의 영상을 끈질기게 볼 집중력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영화는 수많은 배우의 역할과 이름도 기억해야 한다. 주인공이 회상을 하거나 시간 흐름이 과거로 돌아서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이해해야 할 정보가 늘어나면, 지루한 장면이 등장하면 동행자가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상영관을 나설까 고민한다. 늘 이랬던 건 아니다. 대학을 다니던 스물 무렵에는 하루에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봤다. 일주일에 하루는 수업 없는 날을 만들어 자체 문화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리뷰를 쓰는 조건으로 연극과 영화를 줄줄이 본 것도 잊히지 않는다. 취향과 어긋난 극이더라도 집중력이 따라주니 결말까지 이어볼 수 있었다.
지금은 영화 한 편을 볼 때마저 정지 버튼을 누른다.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전에 필요한 예열 작업이랍시고 짧은 영상을 연달아 넘긴다. 보고 싶은 영상을 찾아보는 건 괜찮은데, 내 경우는 언제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방향으로 넘어간다. 굳이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계속 돌아가는 영상을 틀어놓고 틈틈이 추천 댓글을 확인한다. 덕분에 요즘 트렌드는 거의 알게 되었지만 정작 내 일과 생활은 신경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진득하게 파고드는 힘이 줄어드니 엉덩이를 붙이는 시간도 짧아졌다.
다달이 과제를 내야 하는 방식처럼 촉박한 마감 일정이라도 생기면 나아질까 싶어 한 수업에 등록했다. 좋아하는 시인님께서 퇴고를 중점으로 합평해 주시는 귀한 강의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첫 시간에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에게는 퇴고라는 무기가 있어요. 한 번의 무대에 선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고쳐 쓸 수 있어요.” 하루 어치의 일기를 쓰기도, 업무 하나를 하기도, 메일 하나를 보내기도, 책 한 권을 연달아 읽기도 벅찬 나다. 그런 내가 과연 쓴 글을 지우고 또다시 고칠 만큼의 집중력을 기를 수 있을까. 가능성을 헤아리자 막막해졌다. 집중력이 낮은 탓에 같은 시간을 들여도 낮은 효율을 보이는 스스로가 못 견디게 미웠다.
방구석
플리 여행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달고 살았다. 오죽하면 초등학생 때 반에서의 역할이 음악 부장이었다. 반장도, 부반장도, 청소 부장이나 정보 부장도 아닌 음악 부장은 적재적소에서 음악을 트는 내게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별 것은 없었다. 그저 제때 음악을 틀면 되는 거였다. 체험 학습으로 한라산 등산을 할 때는 발을 신나게 움직일 수 있는 음악을, 윗세오름까지의 고된 등산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나른한 음악을, 색종이를 접거나 집중해야 할 때는 어느 정도 경쾌하면서 잔잔한 음악을 골랐다.
공부를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는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문제집을 풀었다. 늦은 밤에 탄 버스 안에서는 주로 아이돌 그룹의 숨겨진 수록곡이나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인디 싱어송라이터의 노래를 들었다. 가사에 집중한 나머지 창가에서 소매로 눈물을 톡톡 닦았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절절하게 타오른 음악을 향한 열정은 스물의 봄에 사그라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합격한 대학교 밴드 동아리에서 야심 차게 떨어지고 만 거다. 이후 축제는 물론이고 콘서트도 가지 않았건만, 이어폰도 안 끼고 집에서도 노래를 듣지 않았건만 다시금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밴드에 떨어진 날로부터 일 년 뒤였다.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이사하고 처음으로 스피커를 선물 받은 덕분이었다.
오만 원도 되지 않는 투박한 스피커였지만 음질에 감탄하며 자기 전까지 여러 음악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엮은 플레이리스트였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적재적소에 맞는 음악을 틀었듯 음악을 삶 곳곳에 담은 이름 모를 이들이 직접 고른 플레이리스트를 들면 외로움이 덜해졌다. 특히 노동요라는 제목으로 빚어진 플레이리스트의 곡은 신기할 만큼 집중이 잘 됐다. 주로 아이돌의 음악을 빠르게 배속해 편집한 곡들이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기 전까지 일 하나를 해치우고 말겠다며 다짐한 날도, 월요일 아침에는 ‘출근하기 싫을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현관을 나선 날도 생생하다.
집중력이 낮아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고심하며 플레이리스트를 골랐다. 제목부터 눈에 띈다. ‘이 플리는 두 시간짜리다. 뭐든 두 시간 동안 할 수 있지?’ 같은 느낌이다. 제목을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신한 작명 센스에 놀랄 때도 많다. 이별 후 문득 들이닥친 외로움에 당황한 네게, 산들바람이 부는 봄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네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과거의 네게 같은 제목이었다. 상황을 알아맞히는 플리를 신기해하며 틀기도 했지만 도시에서 듣기 드문 파도 소리나 시골집에서 눈 감고 듣던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불면증을 견딜 때도 있었다.
때에 맞춰 적절한 음악을 골랐던 때처럼 집중력이 낮아질 때마다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덕분에 자그마한 내 방은 헤르미온느가 공부하는 웅장한 호그와트 도서관이 되었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업실이 되기도 하고, 악동뮤지션의 가을 콘서트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검색창에 적힌 흔적을 지워야겠다. 집중력에 좋은 영양제 한 알도 괜찮지만 요즘 내게 필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나의 하루를 조금 더 낭만적으로 만들어주는 플레이리스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