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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Oct 06. 2023

결코 시시하지 않은
시시콜콜한 장면


  뜻밖의 풍경을 만나고 싶어 여행지에서는 부러 지도를 꺼내지 않는다는, 미디 팬티와 맥시 팬티 사이에서 고민하다 맥시 팬티를 골랐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는, 그런 소소해서 시시껄렁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자주 샘이 난다. 분명 내게도 있었을 일상의 순간을 포착해 문장으로 엮었다는 지점이 부러울뿐더러, 불안과 외로움 대신 소박한 기쁨을 펼칠 수 있는 평온함에 질투가 인다.


  언제나 나는 시시한 농담을 즐겁게 중얼거리다가도 문득 내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이름 모를 누군가를 상상하면 몸을 한데 부풀리는 공작새나 복어처럼 거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령 슬픔이나 죽음 같은 것.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어둑한 자정까지 김밥을 말아도 빚에 시달리는 엄마나 이번 추석에는 둘째의 산소에 들르는 게 어떻겠냐는 아빠의 물음 같은 것. 그런 이야기는 잊으려 애써도 몸 어딘가에 고이고 굳어져 글이란 걸 쓸 때마다 튀어나왔다. 잔잔하게 어린 슬픔은 문장에 슬며시 스며들어 어느새 또 아린 글을 완성했다. 사람들에게는 고인 슬픔이 해소되도록 마음껏 방류하라는 조언을 했으면서, 정작 나는 아픈 이야기를 쓰는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눈물을 보이는 건 연약함을 들키는 거야.


  따끔한 충고에 급하게 소매로 눈물을 닦던 열셋의 내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살아보니 우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더라. 울 법한 일에도 노련하게 눈물을 참을 수 있었던 건 모든 걸 통달한 듯한 선생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서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 우는 대신에 울음을 삼킨 이야기를 적었다. 돌이켜보면 상황을 헤집으며 글을 쓰는 동안 지난 시절을 무사히 지나왔다는 안도감에 눈물 몇 방울 흘릴 만한데, 울면서 적은 글은 감정에 심취해 이도저도 아닌 글이 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뜨끈한 눈가를 식혔다.


  해진 속옷이 부끄러워 빠르게 벗었다는 이야기나 창문이 없는 고시원에 살던 때는 방문을 열어두면서 바람을 쐤다는 이야기를 묵묵하게 적고 내보였다. 담담하게 쓰고 고치는 연습을 반복하고 학습하면서 문장은 점점 단단해졌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작 감정을 느끼는 어떤 덩어리가 조금씩 마모되는 걸 느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더는 훌쩍이지 못했고 아픈 일이 생겨도 울지 못했다. 이전에는 콧물까지 흘리며 봤던 영화가 무덤덤하게 느껴지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은 말이 머리를 스쳤다. “묵히고 외면한 감정은 오 년 뒤든, 십 년 뒤든 분명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어요.” 고이 묶어둔 울음이 한순간 터지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할 게 빤했으므로 상담소를 찾았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틀어준 음악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상태를 홀로 결론지었다. 우는 것보다야 울지 않는 게 강인해 보이니까 굳이 비밀의 상자 같은 건 궁금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어느 정도는 세상에 연약함을 들키지 않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울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서 때로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에는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주먹을 쥔 다음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점심시간에 회사 책상 아래에서 만든 손톱자국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펑펑 울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이 그야말로 펑펑 울고 싶었다. 입사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회사를 그만두고 첫 번째로 세운 목표는 ‘자주 울고 자주 웃자’는 상투적인 문구였다. 억지로 웃거나 울지는 말고, 그저 찾아오는 감정을 애써 밀어내지 말자고 덧붙인 일기 옆에 깔깔 웃는 아이의 표정을 그렸다.


  굳게 목표를 세웠대도 당장 따르기는 어렵듯 바로 웃음이 나거나 울음이 나오지는 않는다. 해온 방식이 남아있어서다. 비슷한 결로 울적한 이야기만 술술 적던 내가 깜찍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단번에 적기란 어렵다. 글보다 삶이 먼저라는 걸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올봄에 발표한 단편을 읽은 한 독자는 내 문장에 온갖 감정이 가득 응축되어 중간중간 시간을 내어 숨을 쉬어야 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저도 몰래 몰입할 만큼 섬세한 묘사가 돈값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는데 반바지를 닮은 헐렁한 맥시 팬티를 입고 설렁설렁하게 글을 쓰고 싶은 요즘의 나는 그 말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 어렴풋이 이해한다. 그는 내가 덜 무거운 마음으로, 더 가벼운 태도로 오랫동안 글을 쓰기를 깊이 바랐을 테다. 역시 자주 웃고 자주 울어야 한다. 도착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한다. 글 없이는 삶도 없다는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말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선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자연을 배경으로 두고 까르르 웃으며 연달아 자세를 취하는 할머니 무리를 보며 이렇게 얘기한다. 화면을 멈추었다 재생하기를 반복하면서 찬실이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얼굴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비밀이라도 숨겨진 건지 살폈지만 그런 건 없었다. 흔하게 마주치는 길가의 풍경처럼 영화 속 할머니들도 보통의 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다고 하는 건지. 세월이 묻은 웃음이라는 게 당최 무엇인지. 한때는 인생을 전부 통달했다고 여긴 내게 다다른 아리송한 문장에 호기심이 일었다. 세월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면 이 대사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 안다고 자신했던 삶이 문득 궁금해졌다.


  저승사자를 만나거든 얼른 자기를 데려가게 하라는 무서운 농담을 던지는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고 처음 쓴 시를 기억한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글은 몸소 겪은 기다란 시간이 뒷받침되어 빽빽한 묘사를 하지 않아도 울림을 준다. 참신한 비유를 고민하는 시간만큼이나 엄마와 함께 콩나물을 다듬는 기억도 중요하다. 존경하는 작가의 문장을 곱씹는 시간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숲으로 나들이를 떠나는 기억도 소중하다. 어깨에 가득 주었던 힘을 천천히 푼다. 아이스크림이나 떡볶이만으로 한 권을 든든하게 엮을 만한 순간을 차곡차곡 적립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바라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지만,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궁금해지는. 이왕이면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도 펑펑 흘리는 할머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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