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몰라도 손이 가는 음식이 있다. 대체로 배고플 때보다 어느 정도 배가 찬 덕분에 음식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이는 순간이다. 한식을 판다면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기꺼이 주문할 텐데, 외국 음식이라면 혼란에 빠진다. 모든 음식의 이름이 비빔밥처럼 이해하기 쉽도록 지어지기를 바라지만, 초밥을 굳이 스시라 부르는 내게 소망을 표현할 주제란 없다. 그저 어려운 요리명을 앞에 두고 스마트폰을 열기 번거로워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다. 그래도 미식가 친구를 따라 베트남집부터 태국집, 일식집까지 다녀온 덕분에 처음 보는 요리 이름을 보고 어떤 음식인지 유추하는 능력이 생겼다. 고추 그림이 그려졌다면 맵다는 뜻이다. 그러니 마제소바 앞에 붙은 ‘카라이’가 ‘맵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도 메뉴판으로 알았다. 언젠가 마제소바의 ‘마제’도 ‘비비다’는 뜻의 ‘마제루’에서 따왔다는 설명을 들었다. 천천히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나도 알아, 라고 거짓을 부린 건 숨기고 싶은 일이다.
애피타이저로 ‘쏨땀’을 시키고, 겨울날에는 ‘똠양꿍’의 국물을 호록호록 마시는 내가 한 번도 왜 쏨땀이 쏨땀인지, 똠양꿍이 똠양꿍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름의 뜻을 익히는 것보다 먼저 배운 건 어떻게 하면 이 음식을 많이 맛본 것처럼 자연스러운 발음을 구사하는지였다. 메뉴판에 사진이 붙여졌거나 그림이라도 그려져 있으면 다행이다. 요즘에는 요리의 모습 대신 현지어를 붙여 전문성을 한껏 뽐내는 곳이 있다. 단짝과 갔거나 혼자 있다면 종업원에게 슬쩍 물어보거나 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낼 텐데,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인이나 어색한 친구와 함께라면 똑똑한 척을 부리고 싶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늘 모르는 것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다 걸리는 게 더 부끄럽다는 걸 경험으로 알면서, 언제나 그렇다.
처음 ‘가라아게’를 안 건 이십 대 초중반을 보낸 애인과 헤어지기로 합의한 날이었다. 코 끝까지 빨개지는 겨울이었다. 겨울이 오면 잘 만나는 애인과도 왠지 다퉈야 할 것 같은 징크스가 생길 만큼이나 치고받고 싸웠다. 싸울 때 오가는 말들만 기억하고, 정작 싸운 이유는 잊어버리는 날들이 계속될 무렵 우리는 동시에 알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헤어져야 했다. 화장을 두 시간 동안 했다. 그가 가장 예쁘다고 칭찬하던 빨간 목도리를 칭칭 둘러맸다. 구두를 신고 나오는데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화장에 몰두하느라 정작 어느 요리주점을 가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만석입니다, 만석입니다. 분위기가 조금만 괜찮은 집들도 인파로 북적였다.
“야, 치킨 집이나 갈래?”
그가 가리킨 곳은 BHC였다. 아직도 기억한다.
“미쳤어?”
뿌링클을 좋아하는 나지만 차마 BHC에서 이별할 수는 없었다. 일 년을 만난 것도 아니고, 사 년이다. 사 년 동안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인연과의 결별 장면을 웬 공중파 드라마처럼 BHC에서 찍을 수는 없었다. 공중파 드라마도 치킨집에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김을 뿜으며 정처 없이 걸을 무렵 어둑한 골목에 자리 잡은 이자카야를 발견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불빛이 깔린 이자카야는 만석인 집들이 가득한 거리 사이에서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정적을 반긴 우리는 메뉴판을 받았고, 그는 늘 그렇듯 메뉴 주도권을 내게 넘겼다. 역시나 사진도 그림도 붙이지 않은 깔끔한 메뉴판이었다. 심지어 요리의 설명도 없었다. 해물탕은 뜨끈하지만 나눠먹으면서 헤어질 수 없으니까 포기, 스시는 너무 빨리 해치울 게 분명하니까 포기, 사시미는 너무 비싸니까 포기, 그렇게 값과 분위기를 빼고 남은 건 오직 두 가지의 요리뿐이었다. 감자튀김과 가라아게. 감자튀김을 만오 천 원이나 내고 먹기란 힘든 일이었으므로 고민 끝에 고른 건 역시 이것뿐이었다.
“가라아게 먹을래.”
그때 그가 코웃음을 쳤다.
“왜 웃어?”
“아니야, 가라아게 먹어. 가라아게.”
그는 가라아게 한 접시를 시켰고 이내 순살 치킨이 나왔다. 그가 꺽꺽거리며 웃었다.
“너 가라아게 몰랐지? 아까 BHC 안 간다매?”
나는 치킨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까 치킨을 추천한 너 때문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몇 가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여기는 BHC보다 분위기가 낫다, 뭐.”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진 내 얼굴을 가리키며 그가 끄윽끄윽 웃었고, 나는 그 특이한 웃음소리를 따라 덩달아 웃었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멈추고 왈칵 눈물을 흘리며 휴지로 눈을 감쌌다.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그가 답했다.
“우리 오늘 헤어지잖아.”
“그러네.”
나도 울고 걔도 울고, 식탁에 놓인 휴지는 바닥을 보이고, 펑펑 우는 우리 곁으로 주인아저씨가 슬그머니 다가와 언제까지 울 거냐고 물어봤다. 죄송하다며 걔도 웃고 나도 웃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짐을 한 달 미뤘고 정확히 일 년 후에 끝을 맺었다. 사랑이 식어 이별할 때는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쏨땀이 왜 쏨땀인지, 똠양꿍이 왜 똠양꿍인지 맛있게 먹으면서도 굳이 알고 싶지 않을 만큼 알기 싫은 정보였다.
실은 이 에세이는, 핫초코를 홀짝이는 귀여운 장면으로 한 장을 채워볼 요량이었다. 다 읽어서 아시겠지만 완벽하게 실패했다. 요즘 꽂힌 마제소바를 맛있게 맛보면서도 정작 마제소바의 이름은 알지 못하던 나를 풍자하는 이야기를 쓰려했는데, 완전하게 망했다. 어려운 요리의 이름과 어려운 만큼이나 맛있는 요리를 떠올리니 그만 가라아게와 그해 겨울이 떠오르고 말았다. 어쩌면 에세이란 이런 게 아닐까. 쓰려고 한 건 쓰지 못하고, 글로 적지 못한 마음에 머무는 무엇들이 절로 꺼내어지는 것. 그러니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대신 밖으로 나가 조금이라도 걸으며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문득 쏨땀의 뜻이 궁금하다. ‘쏨’은 ‘시다’라는 뜻이고, ‘땀’은 ‘찧다’는 뜻이다. 그래서 파파야가 찧어진 채로 샐러드처럼 나왔구나. 어느 정보는 뒤늦게 안 덕분에 더욱 여운이 남는다. 주제도 없고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글이 언젠가 생각날 것 같다. 오랜만에 힘을 빼고 부담 없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