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을 쓰고 나서 몰려온 감정은 시원도 섭섭도 아니었다. 어떤 단어로 이 감정을 표현해야 할까. 설렘보다는 가라앉은 느낌이고 울적함보다는 들뜬 느낌이다. 느낌으로 표현하기보다 문장으로 쓰는 게 더 적확하겠다. 따지자면 ‘비밀이 없어진 기분’이다.
제주에 살면서 제주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비밀을 첫 책에 적었고, 세 살 터울의 동생과 사별했다는 비밀을 두 번째 책에서 밝혔다. 에세이스트는 일상을 섬세하게 포착해 글로 적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 에세이스트란 비밀을 켜켜이 내보이는 직업이었다. 좋아하는 글의 종류만 봐도 그랬다. 엄마의 비밀을 꺼내어 적어도 괜찮겠냐는 허락을 받아 딸이 적어낸 에세이를 소중하게 여겼고, 어떤 잘못을 한 과거의 자신에게 부치는 편지를 읽을 때 눈물이 났다. 그들은 비밀을 알렸고 적었다. 과감하게 복기했고 문장으로 생생하게 표현할 만큼 기억해 냈다.
어디서 그런 비밀을 밝힐 용기가 났는지 신비할 만큼 비밀스러운 글을 읽으면 마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데. 가까운 지인들은 몰랐으면 싶지만, 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기를 바라는 비밀이 있는데. 그 마음을 붙잡아 에세이를 썼다. 처음 세상에 내보인 글은 악덕 기업으로부터 퇴사 하루 전에 부당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친구들은 몰랐으면 싶은 마음 반, 온 세상 사람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반을 넣어 꾹꾹 적었다. 그날을 스스로가 여기는 데뷔일이라고 어림잡아본다면 에세이스트로 산 지 어느덧 6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내가 너무 싫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붙잡아 쓴 세 번째 책에도 여러 비밀이 틈틈이 숨어있다. 고시원 부엌에서 만난 친구를 밖에서 만났을 때 들었던 열등감, 삼총사로 몰려다니던 친구와 시절 인연이 되었을 때의 감정, 엄마가 내게만 속삭인 비밀스러운 조언. 첫 책을 쓸 때만큼 쑥스럽지는 않았다. 부끄러움을 공공연하게 밝히는 데 있어서는 지난 몇 년간 단련이나 훈련을 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할 만큼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두 달밖에 다니지 않은 새 회사에는 알려야 할지 말지 고민되었는데,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에 나 혼자만의 노력이 들어간 건 아니어서 그야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세상에 세 번째 책을 내보이는 순간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책은 진짜 잘 되어야 해.” 친구들은 내 말을 듣자마자 이유를 물었는데, “다음 책을 낸다면 쓸 게 없거든.”이라는 답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너, 첫 번째 책 낼 때도 그 말했던 거 기억나지?” 그 말을 듣고서야 불현듯 친구들에게 칭얼거렸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네. 다음 권도, 또 다음 권도 내겠네.” 아직 다음으로는 어떤 글을 쓸지 모르겠지만, 펜을 부러뜨릴 만큼 온 열정으로 책 한 권에 인생을 거는 시기는 지나서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책이 부담이 아닌 설렘으로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았다.
‘책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 보다 ‘글을 썼더니 자연스레 책이 나온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일주일에 이틀 이상은 어떤 글이라도 우선 써보려 하는데 한 권의 책을 엮고 나면 비밀 항아리에 꾹꾹 담긴 비밀이 동나서 채우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이전에는 비밀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억지로 내 안의 모든 기분과 사건을 꺼내려했다. 요즘은 다짐 없이도 이야기가 글로 나올 때까지 마음껏 기다린다. 쓰고 싶을 때 써야지, 와는 조금 다르다. 이제 이 이야기를 써도, 밖에 내보여서 어떤 반응을 얻을지라도 조금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마음을 글로 옮긴다.
⟪내가 너무 싫은 날에⟫의 예약 판매가 열리고 하루 만에 어느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문구가 붙었다. 이전이라면 신이 나서 어떤 일도 손에 쉽사리 잡히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평온하다. 내 인생의 운명은 믿지 않지만, 책이 지닌 운명은 어느 정도 믿는 편이다. 오늘은 잘 팔려도 내일은 잘 안 팔릴 수 있고, 갑자기 한참 뒤에 빛을 보거나 정식 판매가 시작된 시점부터 갑자기 중쇄를 찍을 수도 있다. 잘 될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품에 안고, 문체에 담으려던 담담한 분위기처럼 덤덤한 기분을 유지하려 애쓴다. 우선 내가 할 일은 항아리에 다시 켜켜이 비밀을 쌓아두어 숙성시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