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학과에 입학해 처음 매듭지은 소설의 제목은 ⟨화장⟩이었다. 실화를 소설로 쓰지 말라고 배웠지만, 마음 구석에 엉켜 붙어 도저히 쓰지 않고서는 숨을 못 쉴 만큼 괴로운 심정에 쓴 단편이었다. 화장을 하면 값싸보인다는 할머니의 말에 화장을 피하던 엄마가 할머니의 발인인 화장을 할 때 다시 화장품을 꺼내드는 이야기였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대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누는 시간에 온갖 비판을 들었다. 우리가 겪는 현실의 시대와 동떨어진, 증조할머니나 왕할머니의 삶에나 겨우 가까워 보인다는 의견에 비수가 꽂혔다. 이미 그런 이야기를 들을까 일부러 딸의 시점으로 엄마와 그의 시어머니인 할머니를 관찰하도록 적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한 학우는 “만약 이 이야기가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인물 자체가 말이 안 되죠. 엄마라는 사람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어머니의 수발을 이렇게 들 필요는 없잖아요.” 시어머니를 모시는 엄마를 바라보며 내가 생각했던 지난 이십 년이 한 문장으로 요약됐다. 나는 원고지 70매 분량의 단편 소설을 드라이브 한 곳에 정리도 않고 묵혀두었다.
꼬박 삼 년을 방황하고 다시 쓴 단편의 제목은 입춘대길이었다. 입춘대길이라는 빌라 원룸에 사는 대학생이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였다. 동생을 보내고도 채 풀어지지 않는 의문이 있어 쓴 글이었다. 당선을 바란 글이 아니었지만 어느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작위적이라는 평이 약간 섞여있었다. 현실을 그대로 적은 글이 ‘의도적으로 꾸며 부자연스러운’이라는 뜻의 작위를 담고 있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 넘겼다.
올해는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의 이야기를 청소년 소설로 풀었다. 나와 막내는 강아지라고 불렀지만 아빠에게는 개였던 생명체에 관해 또박또박 적었다. 의견을 나누기 위해 모임에 가져갔더니 글을 읽은 어느 선생님께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다. 이 상황은 불법이라는 말이 잊히지 않았다. 정보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쓴 글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아무 답도 하지 못한 내가 떠오른다. 있던 이야기라고, 일주일 전 벌어진 사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학부 시절 우리를 가르쳤던 교수님의 말이 덩달아 떠올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교수이자 소설가로 활동하는 그의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실화라는 정보를 밝히는 순간 소설다움은 깨지고 우리는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게 된다고. 전혀 실화 같아 보이지 않는 소설이 실은 작가가 겪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건 온라인에 떠도는 자극적인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고. 나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켰다. 소설이 어렵고 두려워진 건 그때부터였다. 겪은 이야기는 한가득인데, 쓰고 싶은 이야기 역시 한가득인데 그 이야기들은 단지 실화라는 이유로 꺼내어질 수 없다는 게 아렸다. 그래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아예 처음부터 실화라고 밝혀버리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내가 직접 똑똑하게 겪었다고 씀으로써 더는 작위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여기 증인이자 당사자가 서 있다고 하니 글이 부자연스럽다거나 주제가 이상하다는 말은 듣지 않았지만 실화라고 증명함으로써 낱낱이 파헤쳐버린 나의 사생활은 복구할 수 없었다.
소설을 다시 시작한 요즘에는 작위적이라는, 그러니까 부자연스럽고 현실에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서평을 본대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하게 쌓는 작업을 이어간다. 몇 년이 흘러서야 교수님의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어 이 이야기는 진짜 있었던 일이고,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구분 짓지 않는다. 교수님은 “작가의 첨언이 길어질수록 변명이 되고 만다.”는 철칙을 지닌 분이었다. 변명이 되지 않도록 글에 내가 적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낼 예정이고, 그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적절하게 다듬고 있다. 그래도 쓰다 보면 너무나 자전적인 소설이 아닌가, 이게 에세이가 아니고야 무엇인가 말인가 싶은 혼란에 빠지는데 그러면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를 펼쳐 스스로를 다독인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는 이승우 소설가의 의견을 지지한다. 나는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인 글을 쓰고 있다. 실화 같은 허구와 실화 같지 않은 사실이 뒤섞인다. 어느 이야기가 진짜인 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글을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