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Jun 22. 2024

시간을 가끔씩 날리는 방법


4. 네 번째 손톱



"이거, 킬링 타임용 영화래. 재밌겠지?"


하루에 영화 세 편을 봐도 끄떡없는 전 애인에게 킬링 타임용으로 웃긴 영화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듯 말했다.


"시간을 꼭 죽여야 해?"


모두가 쓰는 '킬링 타임 영화'를 그대로 쓴 것뿐인데, 둘 모두 대학생인 데다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방학이니까 푹 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돌아오는 답은 딱딱했다. 돌이켜보니 그는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상영된 고전을 찾았고 죽기 전에 봐야 할 백 가지 영화 리스트를 섭렵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고찰 없이 시시덕거리는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그때는 스스로를 애인의 취향도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실없는 이야기를 꺼낸 철없는 사람으로 느꼈다. 그는 웹툰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했다. 종일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게 뻔한 판타지 웹툰이나 소소한 웃음을 나누는 일상 웹툰의 다음 화를 보기 위해 돈을 바치는 것도 자신은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그 몰래 웹툰을 하루에 다섯 개는 챙겨보는 편이었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 웹툰을 보는 것도 당연했고, 재밌는 영화나 웃긴 애니메이션을 보는 일도 흔했다.


그와는 이십 대의 반절을 보낼 만큼 나름 오랜 기간 동안 연애를 했고, 그 영향 때문인지 시간을 때우거나 죽이는 킬링 타임용 영화나 웹툰을 멀리했다. 차라리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뉴스를 시청하는 것처럼 생산적인 일을 취미로 여겼다. 지금 만나는 애인 '건'은 예전의 나를 닮았다. 보자마자 낄낄댈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나 예능을 좋아하고, 여러 시리즈물을 섭렵한다. 다 보면 하루가 훌쩍, 아니 일주일이 훌쩍 지나간대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콘텐츠를 보고 감상하고 즐기는 자체를 휴식으로 여긴다. 나는 그런 건이 못마땅했다. 이직 준비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포트폴리오도 다듬어야 하고, 틈틈이 채용 공고도 봐야 한다. 이사를 원하는데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아 전세금을 받지 못하니 중고 거래 앱에 얼른 집을 더 많이 올려야 할 것 같고, 미처 마치지 못한 금요일의 일을 토요일에는 어느 정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하루는 건이 내게 슬쩍 제안했다.


"우리, 오늘은 이 추리 예능 볼까?"


나는 그러자고 답했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건도 그 표정을 파악한 듯했다. 나를 유심히 보던 건이 물었다. 영상을 언제부터 멀리했냐는 말이었다. 실제로 오 년 전에는 영화평을 취미로 길게 쓸 만큼 영화를 사랑했던 나이기에 그의 답에서 전 애인의 '킬링 타임'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킬링 타임을 싫어해. 시간을 죽이면 안 될 것 같거든."


건이 말했다. 진중해서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의 목소리였다.


"때로는 무료한 시간을 날리는 방법도 필요해. 심심하다고 칭얼대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고, 생산성을 높이겠다고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일하는 것도 괴롭잖아. 하루는 이 예능으로 시간을 보내고, 하루는 저 드라마로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 방법을 적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생각에 지칠 무렵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추리 예능을 켰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할 일이 산더미라는 것도 잊고, 언제까지 글을 보내기로 한 약속을 잠시 지우고, 가족과 얽힌 문제를 잠시 까먹었다. 지금 내가 하는 건 웃는 일과 추리하는 일뿐이었다. 완전히 영상에 집중하는 일이었다. 건의 말처럼, 시간을 가끔씩 없애는 방법이 필요했다. 뺑뺑 돌아가는 머리를 붙잡고 돌릴 바에야 재치 있는 콘텐츠를 보면서 열을 식히는 게 오랫동안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인생이 그리 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일 당장 내게 주어진 인생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염두하고 살지만 그 마지막 기억 중 하나가 재밌는 영상을 보면서 배를 긁으며 웃는 장면이라 하더라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네 번째 손톱의 정체는,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다가는 쓸모없이 버려질 거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알차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처럼 계속 알차게 시간을 대해야 할 것 같다. 주말에는 새로운 커뮤니티에도 가보고, 신기한 팝업이 열렸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러 떠나고, 눈여겨보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면 당장 신간을 사서 집중이 안 된대도 완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다. 추리 예능이나 마술 예능은 그 밖의 일처럼 느껴진다. 볼 때야 물론 흥미롭겠지만 결국 보고 나서는 허무함이 느껴지는 시시하고 실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웹툰 역시 마찬가지다. 지하철에서 웹툰을 보기 위해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내리는 누군가를 힐끗 보기라도 하면 속으로는 조금 무시를 하곤 했다. 나는 웹툰에 시간과 돈을 버리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장담할 일일까. 마음 어딘가 깊숙한 곳의 나는 웹툰에서라도 권력을 휘두르는 황후가 되고 싶고, 예능에서라도 고등학생이 되어 살인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 싶다. 때로는 시간을 순간처럼 느끼며 삭제하고 싶다. 시간을 날리고 흘려보내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 오늘은 미뤄왔던 마술 예능을 볼 차례다. 올해 안에는 새로운 웹툰을 시작하고 싶다. 다음 화가 궁금해져서 쿠키를 마음껏 굽는 파티시에가 되고 싶다.


후일담

주말을 일로 채울 수 있었지만, 이미 밀려온 일을 얼른 해치우고 다음 일로 넘어가서 주말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지만 이러다가는 또다시 나의 체력과 정신력이 버텨주지 못할 것 같아서 하루를 과감히 비웠다. 일주일 동안의 여름휴가도 냈다. 여름휴가는 여름 휴가지만, 기다란 휴가답지 않게 정말 아무런 계획이 없다. 일주일 내내 시리즈 대장정을 마쳐도 괜찮을 것 같고, 책으로 열 권쯤은 나온 만화도 연달아 봐도 좋을 것 같다. 내게는 가끔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 날도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가끔 시간을 날리는 날도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