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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15. 2024

온갖 자극을 약으로 해결하다 보면


3. 세 번째 손톱



오랜 단짝으로 여기던 친구에게 일방적인 차단을 당했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밤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이러지 말고 만나서 풀자"는 얘기였다. 그 말은 차단을 당해서 상대방에게조차 닿지 않았다. 다음 아침 나는 출근을 해야 하고, 회사에 가서는 밀린 일을 해야 했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내일 출근을 할 수 있을지 그만 아득해졌다. 명상을 해보고 심호흡도 해봤지만 그 어떤 방법도 나를 그 사실을 마주하기 전의 나로 돌리지는 못했다. 술은 올해부터 끊기로 했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은 약인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꽤 오래 정신과 약을 먹고 있고, 약의 성분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대개 울적하거나 떠오르는 기분이 수평선으로 갈 수 있도록 폭을 좁혀주는 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이 약을 다시 한번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맹신하고 있었다.


이미 일정량의 취침 전에 먹는 약을 삼켰는데 또다시 약통을 뒤지려는 나를 보고 애인 '건'이 말했다.


"이미 오늘 치의 약은 다 먹었잖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약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그건 해결이 아니야."


나는 건이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흔히 시간이 감정과 일을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대꾸를 하고 다시 약으로 손을 뻗었다. 건이 달래듯 얘기했다.


"해결을 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덮고 없애버리는 거지. 지금 너는 상처를 잊고 싶은 거잖아."

"약을 먹고 잊다 보면,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히다 보면 시간의 힘에 의해 언젠가 잊힐 거 아니야."


팽팽했다. 나도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건은 얕은 한숨을 쉬고 의존성에 대해 얘기했다. 힘들 때 술을 찾다가 결국 조그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술을 찾을 수 있는 경우에 대해, 하루에 담배 한 개비만 피겠다고 결심한 이가 한 갑을 모두 피는 경우에 대해서.


고착화된 사고로 이끄는 세 번째 손톱의 정체는, 매일 아침과 매일 밤에 먹는 약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정신과 약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겼고, 그 약이 없는 나는 살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의존성이 짙어지니 문제가 생겼을 때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쉽고 편하게 알약 몇 알을 삼켜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약은 의존성이 있는 약이 아니야." 똑똑하게 말하고 그날 밤은 약을 먹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병원에 가서 선생님께 지금 내가 먹는 약이 의존성이 있는 약이냐 물으니 조금은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다. 선생님의 말이 뒤따라왔다. 의존성이 있는 약이니 하루아침에 끊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천천히 줄여나가야 한다고. 내 성격이 슬픈 상황에 남들보다 취약한 건 맞지만 상황을 모두 회피할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맞서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나는 이 주 간 삼킬 약이 든 수북한 약봉지를 들고 나오며 선생님과 건의 말을 떠올렸다.


실은 많은 일이 벌어지는 중이다. 사이드 잡으로 시작한 사업은 잘 되는지 모르겠고, 아빠는 사기를 당해 누명을 쓰고 재판에서 집행유예와 재산 일부분의 몰수 판결을 받았다. 제주에서 육지로 올라간 막내는 자퇴를 결심했다. 수업이 맞지 않는다고, 교수님들의 강의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에서 일로 엮인 누군가에게 꾸준히 스트레스를 받기까지 했다. 이렇게 이런저런 일로 골치를 앓을 무렵 친구에게 차단까지 당했으니 누군가 나를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했다. 기분을 안정적이게 유지하도록 만드는 약. 그 약이 있으면 적어도 내 감정만은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청심환을 먹으면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혀서 면접을 볼 때 유용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약을 먹으면 생활 전체에 유익함을 끼칠 거라고 확신했다.


약의 수를 늘리기는 했다. 의사는 나를 보며 "밀려드는 상황도 상황인 지라 이 시점에 약을 줄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고, 나는 조금 느리게 수긍했다. 빠르게 수긍하지 않은 이유는 건의 말이 컸다. 약이 만병을 치료해주지는 않는다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고, 때로는 직면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보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되뇌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에. 기면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는 건은 아침마다 잠이 깨는 약을 먹지만 그 약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언제까지 이 약을 먹어야 하냐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영양제처럼 삼킬 뿐이다. 분명 약을 삼키면 효과는 드러나지만, 그 효과가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쳐 내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 약이 없으면 내 삶이 파괴될 거라고 믿고, 언젠가 약을 끊고 싶은데 그날이 도대체 언제 올 건지 아득해한다. 약과 해결이라는 단어를 연상 짓지 말아야 한다. 약은 그저 약이다. 나를 도와주기는 하지만,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후일담

오늘 악뮤의 콘서트를 간다. 실은 차단당했다는 슬픔에 못 이겨 수수료를 물고 콘서트를 취소하려고 했다. 그렇게 집에 있으면 계속 슬픈 생각만 할 테니까, 오히려 콘서트도 못 가고 청승맞게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말 테니까 콘서트를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좌석은 좋은 좌석이 아니라 꼼꼼하게 오페라글라스까지 챙긴다. 산뜻한 곡을 듣고 화려한 무대를 즐기며 시간의 힘을 믿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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